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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內外渤海史認識與研究


宋基豪
2007-04-09 18:49:36 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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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발해사 인식과 연구

발해는 전성기에 그 영역이 동쪽으로 沿海州, 서쪽으로 遼東地方, 북쪽으로 松花江까지 미쳤고, 남쪽으로 大同江과 龍興江(金野江)을 잇는 선을 경계로 신라와 이웃하고 있었다. 국가로 따진다면 중국, 북한, 러시아에 걸쳐 있었던 광대한 나라였다. 따라서 발해의 역사는 한국에서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와 함께 발해가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던 일본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발해사는 단순히 한국사의 한 부분에 머물지 않고, 국제적인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금세기로부터 1994년 전반기까지 발표된 글들을 망라하면 1,500여 편이 되는데, 이를 국가별로 분류하면, 중국이 전체의 45%, 일본이 24%, 남한이 16%, 북한이 5%, 러시아가 10%를 각기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정이기 때문에 연구사를 정리할 때에 어느 한 나라에만 비중을 두기가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국에서의 발해사 인식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중국․일본․러시아에 관한 것도 함께 다루도록 하겠다.1)

먼저 국내에서 발해사 인식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겠다.2)크게 보면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兩面的인 認識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들어서 한국사에서 제외하였다가 후기에 발해의 역사를 재발견하는 커다란 전환을 이루었다. 이 때에 발해에 대한 인식과 연구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미완성인 채로 중단되었다. 일제시대에 들어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으나 구체적인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실증적인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80년대부터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비록 시대적 배경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한국에서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던 시기에 발해에 대한 인식과 연구도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그 흐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신라인들은 발해를 高句麗系 國家로 인식하였는가 하면 靺鞨系 國家로도 인식하였다.3)이러한 인식은 崔致遠의 글 속에서도 뒤섞여 나타나고 있다. 그는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4)고 하였고, “고구려 殘孼들이 모여서 발해를 세웠다”5)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라인 자신들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잔당이 세웠다고 하여 발해를 낮추어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반면에 그가 지은 다른 글에서는 “발해는 말갈족이 번성하여 세운 나라”6)라고 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가 말갈계 국가임을 천명하는 모순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양면적 인식은 비록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도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발해를 靺鞨渤海, 渤海靺鞨, 靺鞨, 狄國, 北狄 등으로 표현하여 적대감을 나타낸 곳이 있는가 하면, 北國이나 渤海로 표현하여 다소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한 곳도 있어서 역시 발해를 대하는 태도에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발해가 존재하던 당시에 이미 신라인들이 양면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발해 사회의 이중적 구조이다. 발해 사회는 크게 고구려인과 말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둘째는 발해의 건국자인 大祚榮의 출신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아마 그는 말갈인의 혈통을 가지고 고구려 장수의 직책에 있었던 靺鞨系 高句麗人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셋째는 양국 사이의 외교 관계를 들 수 있다. 발해에는 두 가지 인식이 가능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었지만 신라인들이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두 나라가 적대적인 때였느냐 우호적인 때였느냐 하는 외교적인 상황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後三國 統一을 기반으로 성립된 高麗는 기본적으로 新羅 繼承意識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나, 때로는 같은 고구려 계승국가라는 점에서 발해가 주목되기도 하였다.7)고려 초기에는 발해를 ‘婚姻한 나라’ 또는 ‘親戚의 나라’라고 하여 동질의식을 나타내고 있었다.8)이에 따라 발해 유민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였고, 934년에는 발해 세자 大光顯을 왕족으로 우대하였다. 그리고 936년에 後三國을 통일한 왕건은 서역 승려를 後晋에 보내 거란을 함께 쳐서 사로잡혀 있던 발해 왕을 구출하자고 제의하였고, 942년에는 고려에 온 거란 사신을 붙잡아 유배시키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에도 尹彦頤의 表文이나 高麗圖經에서처럼 발해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윤언이가 仁宗에게 稱帝建元할 것을 청하자, 金富軾은 금나라를 격노시켜 고려를 치는 빌미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매도하였다. 이에 대해서 그는 다만 임금을 높이고자 하는 일이며, 신라와 발해가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이 군사를 동원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9)여기에서 그는 발해를 신라와 함께 중국과는 다른 존재로 파악하였음을 보여준다. 高麗圖經(徐兢, 1124)도 비록 중국인이 쓴 것이지만 당시 고려인의 역사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10)이 책에서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다루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는 三國史記(金富軾, 1145)와 같이 발해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는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발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어, 三國遺事나 帝王韻紀에서와 같이 발해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三國遺事(一然, 1281년경)는 신라 중심의 역사서로서 王曆篇에는 발해가 배려되어 있지 않지만, 본문에는 靺鞨渤海條가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帝王韻紀(李承休, 1287)에서 해소되었으니, 여기서는 발해사가 분명히 한국사의 한 줄기로 파악되어 있다. 이밖에 歷代年表(一然, 1278)11)나 圃隱集(鄭夢周, 14세기)에서도 발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拙藁千百(崔瀣,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에서처럼 신라 계승의식을 고수하는 흐름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두 가지 흐름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지만,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12)대체로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째 단계는 東國通鑑(1485)의 역사 인식으로서, 여기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신라에 이웃하였던 역사로 파악하였다. 고려 태조가 거란에 대해 행한 정책을 두고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하여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13)하는 史論을 달아 비판한 것은 이 책의 역사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는 발해사가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와 이웃하였던 인접국가의 역사로서 다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5․6세기를 지나 17세기까지 근간을 이루었으니, 東國史略(朴祥, 16세기 초), 東史纂要(吳澐, 1606), 東史補遺(趙挺, 1646), 東國通鑑提綱(洪汝河, 1672), 東國歷代總目(洪萬宗, 1705) 등에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同文廣考(저자 불명, 英祖代), 新增東國輿地勝覽(1530), 歷代紀年(鄭逑, 17세기 초), 東史會綱(林象德, 1711) 등도 이러한 계열에 속한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새로이 나타나는 발해사 인식은 이러한 기존의 인식을 수정하면서 극복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시작되는 둘째 단계는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뉜다. 전기에서는 고구려 영토를 계승하였던 나라로 발해를 인식하였으니, 東國地理誌(韓百謙, 1615)가 선구를 이루었다. 韓百謙이 이 책을 저술한 동기 중의 하나가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는 데에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서 찾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한 나라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해가 신라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파악되어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서 설명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東事(許穆, 1667), 星湖僿說(李瀷, 1720년대-50년대), 東史綱目(安鼎福, 1754-1759) 등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전기에는 발해사가 우리 역사의 일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와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건국자도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疆界考(申景濬, 1756)가 선구를 이루었다. 그는 新羅古記나 최치원의 글을 인용하여 乞四比羽는 말갈인이고 乞乞仲象은 고구려인이라 하였다. 또 고구려가 망한 지 10년 후에 대씨가 고구려 유민을 불러일으켜 옛 땅을 회복하였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刺史를 죽임으로써 前王(고구려왕)의 치욕을 설욕하였으며, 忽汗州를 평양성이라 부른 것은 옛 도읍지를 못잊어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특히 고구려왕을 前王이라 표현한 것은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가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아주 중요하다.

그의 역사 인식은 東國文獻備考(申景濬, 1770)의 輿地考를 집필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여기서 발해와 定安國을 扶餘․東沃沮․報德國 등과 함께 고구려 屬國으로 다루었다. 여기서 속국이란 말에는 服屬國과 繼承國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으니,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대조영은 고구려 옛 장수로서 그 유민에서 일어나 前王의 땅을 모두 회복하였으니, 그는 曠世의 호걸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경준의 발해사 인식은 紀年兒覽(李萬運, 1777), 靑莊館全書(李德懋, 18세기 후반), 燃藜室記述(李肯翊, 19세기 초), 大東掌攷(洪敬謨, 1818-21년경) 등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셋째 단계에서는 앞 단계에서 주로 고구려 계승국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사를 인식하던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하였던 독립국으로 다루거나 일부에서는 발해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 때에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世家, 世紀 등으로 취급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南北國時代를 설정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東史(李種徽, 1803년경)에서 출발하였다. 이 책은 비록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紀傳體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역사서에 해당한다. 그 편목을 보면 삼국 이전의 역사는 本紀로 처리하였지만 삼국은 본기에서 서술되지 않았으며, 부여․발해․가야의 역사가 世家로 다루어졌다. 따라서 여기서는 발해를 신라와 대등한 수준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종래와 같이 삼국보다 한 단계 아래인 부여․가야 등과 동등한 수준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발해사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인식하던 단계에서 나아가 독립된 나라의 역사로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아주 크다.

더구나 그는 우리 나라 땅이 발해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루다가 고려 이후에 축소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가 약한 나라로 전락한 것이 발해의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찾고자 하는 대상이 고구려 옛 땅에서 발해 옛 땅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앞 시대에 한백겸․이익․신경준 등이 우리 나라가 약한 나라가 된 이유를 고구려 영토의 상실로 보면서 발해의 건국을 가리켜 ‘고구려 영토를 잃었다’고 표현하였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들이 발해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라 측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이러한 설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고구려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高句麗故土 회복 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종휘는 이와 다르게 발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渤海故土 회복 의식을 표명함으로써 발해사 인식면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종휘의 발해사 인식은 東史世家(洪奭周, 1820년대)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 홍석주는 발해사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와 함께 世家로 다루어 삼국과 발해를 동등하게 보았다. 海東繹史(韓致奫, 1814년경)와 海東繹史續(韓鎭書, 1823)도 역시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한치윤은 발해사를 世紀로 다루어 신라사와 동등하게 취급하였고, 한진서도 古今疆域圖에서 삼국과 함께 발해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정약용은 체계적인 역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발해사 인식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內閣親試에서 발해의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이미 피력한 바 있다. 그의 발해사 인식이 구체화된 것은 疆域考(丁若鏞, 1811, 1833)에서이다. 그는 한백겸의 설을 따라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고조선․4군․고구려․발해로 이어졌고, 남쪽에는 3한이 백제․신라․가야로 이어진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북방 계열과 남방 계열의 역사를 거의 동등하게 다룬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 후자는 渤海考(柳得恭, 1784)가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柳得恭은 서문에서 고려가 발해를 신라와 동등하게 다루어 남북국 역사를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의식을 담았다. 이러한 의식은 大東地志(金正浩, 1866년경)로 이어졌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 方輿總志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으며, 渤海國에서는 삼국(신라․가야․백제)-삼국(고구려․신라․백제)-남북국(신라․발해)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상의 두 흐름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두 흐름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지 못하고 각기 독립적이었다는 것은 이 당시 발해사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차 이 두 부류가 하나로 융합되어 고대사 체계가 완성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이 나타나지 못한 채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의 발해사 인식은 미완의 형태로 끝나버림으로써 다음 세기로 과제가 넘겨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한껏 고조된 발해사 인식은 비로소 발해사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낳게 되었다.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주로 영토적인 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는 자연히 地理考證으로 나타났다.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는 이미 󰡔東國地理誌󰡕에서부터 독자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東史會綱, 東史綱目�등으로 이어졌지만, 19세기 초에 丁若鏞․韓致奫․韓鎭書에 이르러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海東繹史續에 실린 지리고증은 후에 徐相雨를 통하여 중국에 소개되어 渤海疆域考(徐相雨 輯, 1925)라는 이름으로 그곳에서 간행됨으로써 청나라 학자들의 관심을 샀다.

지리고증의 주요 논점은 建國地 및 5京․15府의 위치, 발해의 서쪽 및 남쪽 경계 문제였다. 건국지에 대해서는 太白山과 東牟山이 과연 어디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敦化市 부근의 額敦山으로 비정한 정약용의 견해가 현재의 통설에 가장 가깝다. 5경․15부의 위치 비정은 遼史�地理志나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明․淸 시대의 문헌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책들은 발해가 마치 遼東지방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였는데, 그러한 오류가 왜 발생하였는가를 규명하고 이들의 원래 위치를 역시 현재의 통설과 거의 비슷하게 비정한 것이 疆域考와 海東繹史續이다. 

그리고 서쪽 경계 문제와 관련해서는 요동지방이 과연 발해의 영토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 남쪽 경계 문제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가 거론되었다. 첫째는 대동강 북쪽에서 압록강 남쪽까지가 과연 발해의 땅이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라와의 경계를 이룬 泥河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 新唐書에 弁韓이 발해 땅이 되었다고 한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상과 같은 지리고증에서 비교적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발해사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선다. 특히 이들이 遼史 地理志의 기록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힌 것은 당시 중국과 조선을 통틀어 처음으로서, 발해의 지리고증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발해사 연구는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상으로 보건대 조선시대의 渤海觀은 15․6세기까지의 인식이 17세기 초반, 18세기 중․후반, 19세기 초반을 경계로 획을 그으면서 변화하다가 19세기 중반부터 퇴조해버린다. 각 시기마다 변화를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반의 경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여러 차례의 外亂 때문이었으며, 18세기 중․후반은 18세기 초반에 세워졌던 定界碑를 둘러싼 북방 영토 문제 때문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들어와 종래의 高句麗故土 회복 의식이 渤海故土 회복 의식으로 전환된 것은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한 결과로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발해사 인식은 19세기 중반 이후로부터 장기간 침체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개화기의 교과서들은 三韓正統論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국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사 인식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발해사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신라사에 부가하여 간단히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렀다.14)다만 歷史輯略(1905)을 편찬하면서 발해사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던 金澤榮은 나중에 일본측의 발해 사료를 많이 인용하여 韓國歷代小史(1922)를 다시 간행한 것이 돋보인다.

한동안 침체되었던 발해사 인식이 다시 크게 고양된 것은 일제시대 때의 일이다. 특히 民族主義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연계되면서 滿洲 지역의 北方史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으니,15)이러한 모습은 朴殷植, 申采浩, 張道斌, 權悳圭 등에서 찾을 수 있다.

朴殷植은 渤海太祖建國誌(1911)를 발표하였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서 그의 발해사 인식을 파악할 길이 없다. 申采浩의 발해사 인식은 讀史新論(1908)과 朝鮮上古史(1931) 總論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발해사 인식에서 柳得恭과 李種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격하시키고 발해를 단군․부여․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로 파악하여 ‘兩國時代’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 연구와 역사 서술로 이어지지 못하고 史論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의 삼국통일 평가와 발해사 인식은 훗날 북한의 역사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신채호에게서 영향을 받아 국사 개설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예들도 보인다. 張道斌은 國史(1916․1946)에서 南北國’을 설정하였고, 權悳圭의 朝鮮留記(1924)와 黃義敦의 上古時代(1943)16)에서 각기 ‘南北朝’를 설정하였다. 

한편으로 大倧敎 계통에서는 남방사보다 북방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만주에서 일어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중시하였으며, 발해 수도 東京城 부근에다가 1933년에 渤海農場을 세워서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 정신을 앙양한다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혀 북방사를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보인다.

일제시대에는 발해에 대한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다만 張道斌의 연구가 눈에 뜨일 뿐이다. 그는 일제시대에 渤海太祖(1926)를 발표하였고, 해방 후에도 大韓歷史(1959), 國史槪論(1959)에서 발해사를 지속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신채호의 영향이 컸으며, 이와 함께 그가 망명지에서 유적을 직접 답사하였던 경험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1912년 경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뒤에 우수리이스크(송왕령) 지역의 성터를 답사하여 이곳을 고구려 柵城 또는 발해 東京 소재지로 추정하였다. 이것은 현재의 통설과는 다르지만, 한국인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연해주 유적을 답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주 크다.17)

해방이 되면서 발해사 연구는 남․북한에서 각기 재개되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李龍範이 연구를 주도하였다. 그는 60년대에 발표된 글들에서 기왕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서 한국사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였고, 발해 왕실을 고구려 桂婁部와 연결시켜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70년대에 이르러 발해의 社會構成과 遺民史의 연구에 남다른 업적을 남겼지만, 오히려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주저하였던 면도 보인다.18)이 당시 그의 연구에는 과거 일본인들의 연구 성과가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宋基豪, 韓圭哲, 盧泰敦, 金渭顯, 徐炳國, 崔茂藏 등이 참여하였고 이보다 늦게 林相先, 金恩國 등이 뒤를 잇고 있다. 그리고 근년에는 일련의 석사논문들이 발표됨으로써 연구 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연구 분야도 다양화되었다. 역사학 분야에서 대외관계, 유민, 사회구성 등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었으며, 중국 측의 고고학 자료도 직접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학․음악․미술․불상․복식․건축 등의 인접학문으로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었다.19)

아울러 이러한 성과들은 발해사가 한국사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여야 하는가 하는 南北國時代論이 더욱더 심층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20)근년에 들어서 많은 개설서에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채택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발해사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 그렇지만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아직도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한 채로 있다. 이것은 삼국통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국사에서 과연 신라와 발해를 동등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하는 점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 문제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21)도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朴時亨이 196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명제를 제시한 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였다.22)문헌 연구를 통한 그의 주장은 朱榮憲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23)이들의 연구는 발해사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연구를 통해서 발해사를 한국사와 연결시킬 수 있는 기본틀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70년대 초까지 문헌과 고고의 두 방면에서 연구의 기본틀이 마련됨으로써, 그 후의 연구들은 이들의 주장을 보강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당시의 연구에는 문헌사에서 丁若鏞과 金毓黻의 업적을 많이 수용하였고, 고고학 자료는 60년대 전반에 중국학자들과 공동으로 만주 지역을 조사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침체를 보이다가 80년대 들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반에 발해사 연구 기구와 인력이 대폭 확충되어 연구 성과도 더욱 늘어났다. 문헌학자로서 張國鍾, 蔡泰亨, 孫永鍾, 김혁철, 玄明浩 등이 있고 고고학자로서 金宗赫, 李俊杰, 金志哲 등이 80년대에 들어서 새로 가세하였다. 이밖에 장상렬은 60년대 이래 발해 건축사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된다.

그러나 80년대에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高句麗의 계승성, 그리고 高麗에의 계승성에만 너무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방면의 연구는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만 매달림으로써 논증에 무리를 범하고 있고 발해사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거의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연구의 실증성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후대에 엮어진 󰡔陝溪太氏族譜󰡕의 渤海國王世畧史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사료로 이용하고 있고, 심지어는 발해가 고려에 계승되었다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24)그리고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비판없이 받아들여 ‘고려 후국’을 설정하고 성천에서 신의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하는 것도 볼 수 있다.25)이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경향으로서 과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 수준으로 회귀하려 하는 점이 눈에 뜨인다. 檀君陵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이미 드러났듯이 금세기 들어와서의 과학적인 연구 성과들을 포기하고 전근대 사학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근래에 와서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심지어는 실학자들의 견해를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입론의 근거로 삼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고고학에서는 만주의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지면서 1980년대 들어서 함경도 지역에서 발해 유적을 찾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26)그 결과 상당수의 유적들을 새로이 확인하였으니, 문헌사보다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고고학 자료들이 우리들에게는 더 유용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咸鏡南道 新浦市 梧梅里 절터는 특히 주목되는 유적이다. 그러나 조사보고서가 너무 간략하여 유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고, 고구려의 계승성을 설명하려는 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고구려 유적과 구별되는 편년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상으로 근년에까지 한국에서 전개되어 온 발해사 인식과 연구 경향을 살펴보았다. 이제 國外로 눈을 돌려보겠다. 중국에서의 발해사 인식은 舊唐書 渤海靺鞨傳과 新唐書�渤海傳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唐會要, 冊府元龜, 五代會要, 資治通鑑�등은 전자를 따르고 있고, 玉海, 文獻通考, 金史�등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두 역사서에서는 발해사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 채 靺鞨的 요소와 高句麗的 요소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헌들도 이러한 서술을 답습함으로써 새로운 역사 인식이 별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발해사 연구는 19세기에 曹廷杰, 景方昶 등이 지리고증을 하면서 단초를 열었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는 금세기 초에 들어와 唐宴, 黃維翰, 金毓黻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김육불은 발해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들을 망라하고 고증도 정밀하게 함으로써,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학자들의 발해사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방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발해사 연구에서 소강기였다. 이 기간에 貞惠公主 무덤, 河南屯 무덤과 같이 중요한 유적이 조사되기는 하였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우발적인 것이었다.

문화 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는 1970년대 말부터 모든 학문 분야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발해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 이후에 발표된 글이 616편이 되어서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주요 연구자로서는 王承禮, 魏國忠, 劉曉東, 孫玉良, 陳顯昌, 朱國忱, 張泰湘, 鄭英德, 孫進己, 孫秀仁, 王俠 등이 있고, 이밖에 張高, 王成國, 羅繼祖, 宋德胤, 丹化沙도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조선족 학자로서 方學鳳, 鄭永振, 金香 등이 있다. 그리고 林樹山 등은 러시아 논문을 지속적으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데에 공헌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에 중요한 연구 주제로는 발해사의 귀속 문제, 대외관계, 지리고증 등이 있고, 그에 못지 않게 고고 연구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7)특히 성터, 무덤, 절터, 窯址 등을 조사․발굴한 고고학 자료는 발해사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니, 80년대 이후에 조사된 대표적인 유적으로 貞孝公主 무덤, 三陵屯 2호 무덤, 北大 고분군, 東淸 고분군, 上京城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특이한 점이 있다.28)한국이나 중국, 러시아에서는 자기 역사의 일부로서 발해사를 다루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일본의 대외관계사라는 측면 외에도 일제시대에 만주를 지배하였던 경험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년보다도 오히려 일제시대에 발해사 연구가 활발하였음이 통계 자료로도 확인된다.

과거 續日本紀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서들은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보았다. 발해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말에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에 들어와 만주 침략과 연계되면서 주로 지리 고증과 고고 조사에 연구의 중점이 두어졌다. 고고학 성과로서 東京城(上京城), 西古城, 八連城(半拉城) 등을 조사하여 발해의 주요 수도들을 확인하였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에는 鳥山喜一, 三上次男, 駒井和愛, 齋藤優, 和田淸, 津田左右吉 등과 같은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나서 1960년대까지는 소강 상태였다. 연구 내용에서 볼 때에 일제시대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日野開三郞, 新妻利久와 함께 앞 시기의 연구자들이 그대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1970년대 이르러 전후 세대로 구성된 새로운 연구자들이 등장하였다. 이제 와서는 고고학 자료를 직접 접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문헌사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사 전공자로서 石井正敏, 鈴木靖民, 酒寄雅志 등이 있고, 한국사 내지 중국사 전공자로서 古畑徹, 河上洋, 李成市, 浜田耕策 등이 있다. 이밖에 小嶋芳孝, 西川宏 등의 연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연구의 내용이 과거와는 다르게 되었으니, 일본의 대외관계, 정치사, 발해 사회구조를 밝히는 데에 중점이 두어졌다. 발해 사회 가운데에서도 首領制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사회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보겠다.29)발해사에 관한 관심은 19세기에 활동한 비추린(N.Ia. Bichurin) 등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로부터 20세기 전반까지는 연해주의 발해 유적들에 대한 산발적인 조사가 진행됨으로써 향후의 연구에 기초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발해사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다. 이 때부터 오클라드니코프(A.P. Okladnikov)와 그의 제자인 샤프쿠노프(E.V. Shavkunov)가 연구를 주도하였다. 특히 샤프쿠노프는 전체 연구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지금까지 볼딘(V.I. Boldin), 셰메니첸코(L.E. Semenichenko), 이블리예프(A.L. Ivliev) 등의 연구자들을 배출한 대표적인 연구자이다.

1958년에 코프이토(Kopyto) 절터를 발굴하면서 연해주에서의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샤이가(Shaiga) 성터에 대한 조사가 중심을 이루면서 금나라의 유적에 관심이 집중되어 상대적으로 발해 유적에 관심이 덜 기울여졌다. 이에 따라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그 사이에 성터와 주거지들이 다수 발견됨으로써 상당한 자료가 축적될 수 있었으니,30)지금까지 성터 23곳, 취락지 21곳, 무덤 2곳, 절터 3곳으로 도합 49곳의 발해 유적이 확인되었다.31)그리고 이를 토대로 고고학적으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러시아 측 연구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발표된 논문들을 분석해보면 고고학에 관한 것이 70% 이상에 달한다. 이 시기에 새로운 연구자로서 볼딘, 셰메니첸코, 디야코바(O.V. D'iakova), 이블리예프 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과학원 원동지부 원동민족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이상으로 각국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동향을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개괄해보면 발해사 연구는 1980년대에 본격화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80년대 이후에 발표된 글이 전체의 71%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중심을 이루어 온 주제로서는 발해사의 歸屬 문제, 지리 고증, 대외관계, 고고 조사 및 연구, 내부 사회의 여러 양상들, 유민 활동 등이다.32)전체 글을 대략적으로 분류해보면, 전체에서 고고학 분야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이 대외관계 분야이다. 이어서 종족구성, 지방사회, 경제, 정치제도, 문화 등과 같은 내부구조 해명이 있고, 그 다음으로 지리고증, 유민, 귀속 문제, 번역물, 연구사 정리 등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들 가운데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여 온 부분이 발해사의 귀속 문제이지만, 전적으로 이것만 다룬 글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大祚榮의 出自나 발해의 종족 구성, 대외관계, 문화 성격 등 다른 여러 방면의 연구도 직․간접적으로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발해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인식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까지 감안한다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가 되며, 발해사 연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이 되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 각국에서 진행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高句麗 계승 국가로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靺鞨系 국가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보다는 현재의 국가적 이해 관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지배층을 중심으로 보려는 전통적 역사관과 피지배층을 중심으로 보려는 맑스주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이에 따라 견해가 개인적 차원에서보다는 국가별로 갈리는 특성이 있다. 전자는 주로 남․북한과 일본에서 보는 시각이며, 후자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견지하는 시각으로 정리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그룹 안에서도 관점들이 조금씩 다르다. 똑같이 고구려 계승 국가로 보지만, 북한에서는 영토, 주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고구려 일변도로 기울고 있어서 그 만큼 경직성을 띠고 있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고구려 계승 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동의하면서 南北國時代란 명칭을 사용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國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계승 의식, 지방제도면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연속성을 추적함으로써 고구려계 국가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미묘한 입장 차이가 드러난다. 똑같이 말갈계 국가로 보더라도 말갈족의 귀속 문제에서 시각이 갈라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말갈족을 중국에 속하는 소수민족의 하나로서 보는 데에 반해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원동 소수민족의 하나로 보려 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사를 각기 자기 역사의 일부로 다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발해가 粟末靺鞨族을 주체로 한 정권이며, 심지어는 독립국이 아닌 당나라의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두 가지 사실이 연구의 기본 전제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근래에는 孫進己와 같이 고구려도 중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말갈계 국가이건 고구려계 국가이건 간에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중국, 러시아가 모두 자기 역사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연구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글들을 보면, 이러한 주장들이 아직도 실증적 토대 위에서 설득력 있게 전개되어 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 예로서 중국에서 1970년대부터 제기된 발해는 당나라 지방국가였다는 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발해인들이 賓貢科에 응시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빈공과란 신라인이나 발해인과 같은 외국인을 위해서 특별히 설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로부터 冊封을 받았고 당나라에 朝貢을 보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던 王國이었다.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皇帝國의 면모를 원용하였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에 臣屬하면서도 내부적으로 皇帝國의 질서를 일부 유지하려 한 二重體制를 취하고 있었던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그러면서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나라였다. 고고학 자료를 분석해보면 고구려․말갈․당나라 문화 요소 등이 서로 융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사적 계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발해인의 생활 문화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발해인들의 의식은 바로 문헌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문헌 자료에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 계승의식만이 드러나고 있다.

건국 집단의 구성이나 지배 집단의 姓氏 구성에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文王의 시대에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高句麗의 天孫意識을 원용한 사실이 드러나고, 그의 후반기에는 고구려 계승국이란 의미로서 高麗國을 표방하였다. 康王의 시대에도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때에 강왕 자신이 스스로 이러한 의식을 드러낸 것은 발해인의 입장을 밝히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리고 872년에 일본에서 발해 사신을 접대하면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을 내세웠다는 점을 볼 때에 마지막까지 고구려 계승의식이 지속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은 자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사는 한국사의 일부이다.

编辑:李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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