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粟末靺鞨源流與扶餘系集團問題


宋基豪
2007-04-09 19:40:47 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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粟末靺鞨의 원류와 扶餘系 집단 문제

I. 머 리 말

역사적으로 볼 때에 만주지방에는 크게 東胡系, 濊貊系, 肅愼系 세 계통의 종족집단이 거주하였으니, 靺鞨族은 가장 동쪽에 거주하였던 숙신계 집단에 해당한다. 이 일대에 거주하던 집단은 처음에 肅愼으로 불리다가 시간이 내려오면서 挹婁, 勿吉, 靺鞨, 女眞, 滿洲族, 滿族으로 명칭이 변화되었다. 이 가운데 말갈은 563년에 처음으로 역사서에 등장한 뒤로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니, 중국으로 따지면 北朝 최말기로부터 隋나라를 거쳐 唐나라 멸망기까지 그 북방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의 扶餘 및 高句麗, 渤海와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종족집단이었다.

말갈유적의 조사는 1930-40년대 하얼빈 黃家崴子 유적을 필두로 시작되었지만, 1950년대에 들어 러시아학자들이 아무르강 연안에서 유적 발굴을 개시하면서 비로소 그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에는 중국에서도 관련 유적들이 속속 발굴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들어서면서 주요한 연구 성과들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1)

러시아에서 먼저 시작된 말갈 연구는 나이펠드 고분군, 코치코바트카 고분군, 코르사코보 고분군, 트로이츠코예 고분군 등의 말갈 유적을 아무르강 연안에서 발굴하면서 활발히 전개되었으니, 이에 따라 그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黑水靺鞨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이보다 늦게 흑룡강 연안에서 동일계통의 유적들인 綏濱縣 同仁유적, 蘿北縣 團結古墳群이 발굴되어 역시 흑수말갈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길림시 일대에서는 永吉 楊屯 大海猛 상층 유적, 永吉 査里巴 고분군, 楡樹 老河深 상층 유적들이 발굴되어 粟末靺鞨을 연구하는 기초 자료를 확보하였다.

靺鞨은 ꡔ隋書ꡕ 말갈전에서 粟末部, 伯咄部, 安車骨部, 拂涅部, 號室部, 黑水部, 白山部의 7種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ꡔ舊唐書ꡕ 말갈전에서는 數十部가 된다고 하였고, 또한 흑수말갈만 해도 16부가 있다고 하였다. 또 시기가 다소 늦은 고려 文宗 27년(1073)의 기록이지만 東蕃黑水人에 30種이 있어서 이를 ‘三十徒’라 부른다는 구절도 보인다.2)아울러 ꡔ新唐書ꡕ 흑수말갈전에는 思慕部, 郡利部, 窟說部, 莫曳皆部, 虞婁部, 越喜部, 鐵利部의 명칭이 추가로 등장하고, ꡔ新唐書ꡕ 발해전에서도 率賓部가 확인된다. 이들의 분포지를 보더라도 서쪽으로 길림시 일대의 北流松花江으로부터 동쪽으로 아무르강 하구와 사할린섬까지, 남쪽으로 백두산 일대에서 북쪽으로 東流松花江까지 광대한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렇게 너른 영역만 보더라도 말갈이란 다종다양한 집단을 포괄하는 집합체였음이 분명하다.

수많은 집단으로 구성된 말갈이지만,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黑水靺鞨과 粟末靺鞨 정도이다. 부족한 문헌 자료를 보충해줄 수 있는 고고 자료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집단에 대해서는 대체적인 위치 비정을 시도하거나, 일부 고고 유적과 연계시켜 보려는 제안들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3)따라서 말갈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무리이므로, 현재로서는 흑수말갈이나 속말말갈을 선택하여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 글은 그 중에서 粟末靺鞨을 논의의 중심에 놓고자 한다. 길림시 일대에 거주하였던 속말말갈은 高句麗 및 渤海 역사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던 집단이었고, 先住民이었던 扶餘族과의 연속성 문제도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런 까닭으로 이 글에서는 문헌 자료와 함께 고고 자료를 활용하면서 부여와 속말말갈과의 연계성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속말말갈 자체도 과연 단일한 종족집단이었는지에 대한 문제도 검토해보겠다. 아직 발굴 자료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석에 조심스러운 점이 없지만, 그러한 한계도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II. 扶餘說과 勿吉說  

여러 말갈 집단 가운데 학계의 관심이 가장 많이 쏠린 것이 속말말갈이다. 이들이 수․당 및 고구려와 연계되어 활동한 기록이 제법 남아 있으므로, 자연히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이들이 발해 건국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발해 국가의 屬性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들 집단의 성격 규명이 선행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속말말갈의 종족적 속성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견해가 갈리고 있다. 하나는 扶餘系 집단으로 보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勿吉系 집단으로 보는 설이다. 전자는 길림시 일대가 원래 부여 지역이었으므로 이들이 근간을 이루었다는 설명이고, 후자는 동쪽으로부터 물길 집단이 확장해와 扶餘를 밀어내고 새로운 집단으로 형성되었다는 설명이다.

먼저 전자의 견해부터 정리해보겠다. 일찍이 池內宏은 물길이 본래 부여족의 일부로서 부여의 변경지대에서 새롭게 대두되었다고 추정함으로써,4)물길 자체가 원래 부여족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물길을 부여족 일파로 파악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다음으로는 日野開三郞의 견해이다. 우선, 그는 물길과 말갈을 분리하여 서로 다른 종족 계통으로 파악하였으니, 물길은 읍루와 함께 純퉁구스 계통에 속하는 반면에 말갈은 물길을 대신하여 새롭게 등장한 세력으로서 예맥계인 부여국 후예가 주축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5)이렇게 등장한 말갈은 짧은 시간에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隋나라 초기가 되면 靺鞨 7部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주민을 포괄하여 다양한 종족을 포섭하게 되었다고 하였다.6)그 결과, 말갈은 크게 예맥계 종족과 순퉁구스계 종족으로 양분할 수 있으니, 전자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각기 扶餘族과 沃沮族을 모태로 한 粟末部와 白山部가 있고, 후자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後肅愼(挹婁)族, 勿吉族 등을 모태로 한 나머지 5개 部가 있다고 주장하였다.7)결과적으로 속말말갈은 부여족을 모태로 한 집단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孫進己를 비롯한 艾生武, 莊嚴, 干志耿 등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들은 말갈이 예맥족, 숙신족을 통칭한다고 하면서, 拂涅 서쪽의 伯咄部, 粟末部 등은 예맥족에 속하고 불녈 동쪽의 號室部, 安車骨部, 黑水部는 숙신족에 속한다고 설명하여, 勿吉이 西遷했다는 주장에 반대하였다.8)결국 속말말갈은 현지의 예맥족에서 유래하였다고 하였고, 속말말갈의 조상은 송화강 유역에서 처음에 부여의 관할에 있다가 5세기 말에 부여와 함께 고구려에 항복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다.9)그렇지만, 干志耿은 다른 논문에서 흑수말갈을 물길의 후예로 보고 속말말갈은 南部 勿吉과 扶餘의 융합체로 이해함으로써, 그 원류에 대해서 조금 다른 입장을 표명하였다.10)

한편, 한국의 權五重도 말갈의 종족 계통을 양분하여 흑수말갈만 읍루 계통에 속하고, 나머지 말갈은 모두 扶餘, 沃沮, 東濊의 濊族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결과적으로 속말부는 부여국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였다.11)이렇게 속말부를 부여계로 규정한 것은 상기의 견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흑수말갈 이외의 말갈 집단을 모두 예족 계통으로 보는 것은 三上次男의 견해를 계승한 李成市의 파악과도 상통하고 있다.12)그러나 이처럼 흑수말갈과 그외의 말갈로 구분하는 2분법적 구도는 말갈 자체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추후에 등장하는 흑수말갈과 발해의 양립 현상에 끼워맞춘 결과물일 뿐이니, 이 주장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리 없다. 韓圭哲도 말갈의 종족 계통을 두 가지로 보는 손진기, 권오중의 견해에 지지를 나타내면서, 속말말갈을 역시 부여의 예맥계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13)

이상의 견해들은 말갈을 두 계통으로 나누어보면서 속말말갈을 부여의 후예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에 반해서 두번째의 견해는 부여와 무관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일찍이 津田左右吉은 부여가 다른 곳으로 쫓겨가고 그 자리를 물길이 차지하여 세력을 떨치다가, 나중에는 그 휘하의 속말부에 주도권을 넘겨줌으로써 주인공이 바뀌었다고 추정하였다.14)

중국의 楊保隆은 속말말갈이 예맥계에 속한다는 孫進己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말갈을 두 개의 종족 계통으로 볼 수 없고 이들은 모두 숙신 계통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15)그런 다음에 물길 西南邊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여 물길 초기에는 길림시 일대가 그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다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사이에 부여를 축출한 다음에야 길림시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속말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논증하였다.16)이에 비해서 朱國忱과 魏國忠 등은 처음 글에서 물길이 長廣才嶺을 넘어 부여를 구축하고 속말부가 된 것으로 설명하였다가,17)추후에는 속말수 유역에 들어간 물길인이 현지의 부여인과 융합된 산물이 속말말갈이라고 재론하였다.18)한편, 盧泰敦도 5세기 종반에 물길이 발흥하여 農安 지역까지 공격해들어오자 부여 왕실이 고구려로 피신함으로써 마침내 부여국이 소멸되었다고 하면서, 그 결과 농안 일대는 물길-말갈계 집단의 터전이 되어 속말말갈의 활동무대가 되었던 것으로 설명하였다.19)

일본의 菊池俊彦도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말갈에 대한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흑룡강 유역의 말갈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20)가운데 두 유형이 전형적인 것이니, 하나는 입이 벌어지고 목이 가늘고 길다란 花甁形 토기이고, 다른 하나는 목이 별로 줄어들지 않고 구연부도 밖으로 별로 외반되지 않는 壺形 토기라고 하면서, 전자는 흑룡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지만 후자는 흑룡강에서 송화강 유역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하였다.21)후자의 토기는 흔히 말하는 ‘말갈식 도기’로서 筒形罐 또는 長腹罐, 長胴壺로 불리는 것이다. 말갈 7부는 바로 이러한 양식의 토기로 대표되는 공동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면서, 한편으로 말갈문화의 발원지가 러시아학자의 주장처럼 자바이칼-아무르 지역인지 아니면 중국학자의 주장처럼 송화강 중류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22)

이상 연구사를 정리해 보았다. 이 논의는 결국 粟末靺鞨의 母胎가 濊貊系인 扶餘族이었는지 아니면 肅愼系인 勿吉族이었는지가 논점의 핵심이 된다. 과연 어느쪽이 역사적 실체에 더 접근하고 있는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쪽의 견해가 팽팽하다. 이제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 먼저 문헌 자료를 검토한 뒤에 뒤이어 고고 자료를 분석하고자 한다.

III. 勿吉의 西進과 粟末靺鞨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에 扶餘의 근거지에는 세 번 큰 변동이 있었던 사실이 보인다. 첫째는 285년 慕容廆가 부여를 공략했을 때이고, 둘째는 346년 이전 부여가 西遷한 때이고, 셋째는 494년경 勿吉에 쫓겨 고구려에 귀속한 때이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둘째와 셋째 사건 가운데 하나를 도외시하면서 논지를 전개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여의 서천을 생각하지 않고 속말말갈이 형성되었을 때에 부여가 아직도 길림시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여가 물길에 쫓겨 멸망한 사실을 망각하고서 물길 세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부여의 서천 지역을 찾으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따라서 특히 둘째, 셋째 사건에 중점을 두어 검토를 해나가도록 하겠다.

첫째 사건을 보면, 285년에 모용외의 공격을 받아 부여왕 依慮가 자살하고 아들 依羅 등은 沃沮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晉나라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재건하였으니,23)이 사건을 계기로 부여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중요한 것은 둘째 사건부터이다. 346년 이전의 부여 西遷에 대해서는 좀더 심사숙고하여야 하므로 먼저 사료를 인용하겠다. 

(永和二年)春正月, ․․․ 初, 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儁居中指授, 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ꡔ資治通鑑ꡕ 97, 晉 穆帝)

 처음에 부여는 지금의 길림시 東團山 일대로 추정되는 鹿山에 거처하다가 百濟의 침략을 받아 前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 때문에 346년 前燕의 공격을 받아 왕까지 잡혀가는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커다란 숙제가 숨어 있다. 하나는 과연 백제의 정체가 무엇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부여가 서천한 곳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백제의 정체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고구려의 誤記로 보는 주장이 있다.24)이밖에 挹婁나 勿吉 등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도 보인다.25)이에 대한 판단이 어렵기는 하지만 다음 두 가지 사실은 백제가 고구려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광개토왕 시기에 牟頭婁는 令北夫餘守事의 직책을 띠고 북부여 지역을 책임지고 있었고, 이것은 祖父 때부터 세습되어 온 것일 가능성이 큰데, 모두루 일가가 이처럼 북부여 방면의 지배권을 획득한 것은 부여의 서천 무렵까지 그 연원이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한다.26)이 북부여는 부여가 옮겨가기 이전인 초기 도읍지를 가리킬 것이다. 또한 435년 北魏 사신 李敖가 고구려의 사방 경계를 언급하면서 북쪽으로 ‘舊扶餘’에 이른다고 하였으니,27)이렇게 과거형으로 표현된 ‘옛 부여’는 서천 이전의 부여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백제는 고구려의 誤記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이 때 물길은 역사무대에 등장하기 이전이고, 읍루는 부여에 臣屬해 있다가 黃初 연간(220-226)에 반발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28)부여를 밀어낼 정도로 역량을 키우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백제를 고구려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29)

다음 문제는 서천한 장소이다. 그 후보지로는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農安說을 비롯하여 昌圖 四面城說, 四平 一面城說, 西豊 城子山山城說 등이 제기되었다.30)그러나 前期 扶餘 관련 유적은 길림시 일대에서 많이 발견된 반면에, 後期 扶餘 관련 유적이 후보지 가운데 그 어느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점에서 확답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西豊 西岔溝에서는 전기 부여에 속하는31)것으로도 볼 수 있는 유적이 발견되어 주목되기는 하지만, 이곳에 후기 왕성을 비정할 경우 나중에 부여가 다시 勿吉에 쫓겨난 사실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대상 지역은 추후 勿吉의 영역에 포함되는 곳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農安 일대가 주목되고 마침 農安 函營유적, 長春 北紅咀子 유적과 二十里堡 유적에서 부여 관련 유물이 출토되기는 하였지만,32)아직 단정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부여계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의 고고학 발견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일단은 물길 영역 안에 들었던 農安 일대 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세번째의 큰 변동은 正始 연간(504-507)에 고구려 사신이 北魏 조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에 보인다.

正始中, 世宗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 悉弗進曰, 高麗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夫餘, 珂則涉羅所産. 今夫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ꡔ魏書ꡕ 100, 高句麗傳)

여기에는 부여가 물길에 쫓겨서 고구려 文咨王이 이들을 경내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실이 담겨 있다. 사실 문자왕 3년(494) 2월에 부여왕 및 妻子가 고구려에 항복해온 사실이 있으므로,33)서천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부여가 이 무렵에 勿吉에 쫓겨나 마지막으로 고구려에 망명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勿吉은 長廣才嶺 동쪽에 거주하던 숙신-읍루계 종족 집단이었다. 이들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때는 보통 乙力支를 북위에 파견한 475년으로 보고 있다.34)그렇지만 뒤에 인용하다시피 그 이전에 이미 고구려를 공략하였다고 한 언급으로 보아서 이보다 훨씬 이전에 물길이 등장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역사서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572년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547년까지 기록이 이어지다가 25년을 뛰어넘어 이 해에 단 한 번 기록이 나올 뿐이고, 그 대신에 563년부터 이미 말갈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35)따라서 6세기 중반에 물길에서 말갈로 세력이 교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길은 100년 정도 세력을 유지하였던 집단이었다. 그 중심지는 乙力支가 북위로 들어온 여정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지만, 사료에 등장하는 지리의 해석이 구구하여 어느 설을 따를지 애매할 뿐이다. 다만, “勿吉國은 과거의 肅愼國이다”36)는 구절을 보면 숙신과 읍루가 활동하였던 곳이 그 근거지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834년 발해 수도에 도착하였던 당나라 사신 張建章의 묘지명에서 “忽汗州(발해)는 挹婁故地”라고 적시하였으므로,37)발해 중심지인 목단강 일대가 숙신, 읍루, 물길의 활동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長廣才嶺 동쪽 일대가 읍루의 근거지였던 사실은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38)또한 물길은 “돌로 화살촉을 만든다”39)는 구절과 “拂涅 以東은 모두 石鏃을 사용하니 과거의 肅愼氏이다”40)는 구절을 비교해보면 불녈부가 있던 牡丹江 以東, 즉 長廣才嶺 동쪽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에 물길의 주된 활동무대는 牡丹江 유역과 그 동쪽 일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長廣才嶺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乙力支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확인된다. 

延興中, 遣使乙力支朝獻. 太和初, 又貢馬五百匹. 乙力支稱, ․․․ 自云其國先破高句麗十落, 密共百濟謀, 從水道幷力取高句麗, 遣乙力支奉使大國, 請其可否. 詔勅三國同是藩附, 宜共和順, 勿相侵擾. 乙力支乃還. (ꡔ魏書ꡕ 100, 勿吉國傳) 

을력지는 앞서 고구려 10부락을 격파하였고, 비밀히 백제와 공모하여 水路를 따라 고구려를 취하고자 한다면서 그 可否를 北魏에 묻고 있다. 여기서 을력지가 사신으로 갔던 475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 10落을 취하였고 또한 수로를 따라 고구려를 공격하려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 공격 수로는 北流松花江이었을 것이므로, 고구려 10落도 이 부근에 해당될 것이다.41)그렇다면 고구려 최북단 전진기지였고 과거 부여가 자리잡고 있던 길림시 일대를 취한 사실을 ‘고구려 10락’의 점령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그보다 서쪽으로 옮겨가 있던 부여마저 구축해버렸던 것이다. 결국 물길은 5세기 중후반에 長廣才嶺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고 이어서 부여를 멸망시킴으로써, 그 세력 범위를 서쪽으로 크게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 西進 세력을 모태로 하여 길림시 일대에서 粟末靺鞨이 등장하였고, 이제는 이들이 고구려와 접경하여 兩者가 세력 경쟁을 벌여나가게 되었다.

이상에 등장한 중요한 사건을 연대별로 재정리를 하면 지금까지의 고찰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85년 慕容廆의 공략으로 부여가 옥저로 쫓겨갔다 돌아온 적이 있었고, 다시 346년 이전에 백제(고구려)의 공격으로 西遷함으로써 이제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시 일대는 고구려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475년 이전에 물길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西進하기 시작하여 5세기 중후반에 길림시 일대의 고구려 10落을 격파하고 475년 북류송화강을 통하여 고구려 본토로 공격해 들어갈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北魏의 반대로 무산되어 버리고, 그 대신에 494년경 더 서진하여 서천해 있던 부여를 쳐서 멸망시켰다. 결국 과거 부여의 중심지였던 속말수 유역은 5세기 중후반부터 물길이 장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속말말갈 부락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여족을 모태로 하여 속말말갈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게 된다. 속말말갈은 물길에서 태동된 세력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사료가 하나 더 있다. 李謹行은 隋나라에 歸附하였던 粟末靺鞨 酋長 突地稽의 아들로서 ꡔ新唐書ꡕ 열전에 靺鞨人으로 되어 있다.42)그러면서 그의 墓誌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公諱謹行, 字謹行, 其先蓋肅愼之苗△涑沫之後也. 東蕃△△△△△△疏疆, 北闕來朝, 陳△△△△△△. ․․․ 曾祖△, 祖△, 幷代爲蕃長. 父稽, 左衛大將軍․燕州刺史․耆國公, 宇扃沈毅, 藝用驍雄, 入擅銜珠之榮, 出預分△之重.43) 

그의 가문을 보면 아버지 稽(突地稽)뿐 아니라 曾祖父와 祖父도 모두 말갈 추장을 역임하였으니, 그는 필연 순수 속말말갈인 혈통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선조가 肅愼의 苗裔이며 涑沫의 後裔라고 함으로써, 속말말갈족으로서의 그의 가계가 숙신의 후예라는 계승의식을 뚜렷이 지니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로 보아도 속말말갈은 숙신의 후예요, 물길의 후예임이 분명해졌다. 이제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검증해보겠다.

부여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帽兒山古墳群을 일차로 손꼽을 수 있다. 이 유적은 부여의 지배층들이 남긴 핵심 유적으로서 부여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관건이 되고 있다. 1985년 5월에 처음 3기의 고분을 구제 발굴하면서 그 면모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고, 1989년부터는 지속적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44)그러나 최초의 구제 발굴에 대한 보고 외에는 考古學年鑑에 극히 단편적인 소식만 전하고 있을 뿐으로, 그 전모를 파악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체적인 내용을 보면, 고분군 범위는 帽兒山을 중심으로 하면서 남쪽의 炮手口子 일대에서 북쪽으로 龍潭山 기슭까지, 동쪽으로 裕民村에서 서쪽으로 松花江邊까지 대략 8㎢에 걸쳐 있으며, 무덤 양식은 土壙木槨墓가 중심이 되면서, 土壙墓, 土壙木棺墓, 土壙火葬墓, 土壙積石墓, 土壙石壙墓도 발굴되고 있다. 앞으로의 조사에 따라 부여의 구체적인 면모들이 속속 드러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를 다룰 만큼 자료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부득이 다른 자료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부여 유적으로는 모아산과 그 일대의 東團山, 南城子 유적 이외에도 大海猛 유적, 老河深 유적, 泡子沿前山 유적, 學古東山 유적과 學古 고분, 土城子 유적 등이 손꼽히고 있다.45)이들은 모두 중심연대가 漢代이므로 부여가 西遷하기 이전에 형성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가 서천한 이후의 유적이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부여의 유적과 속말말갈의 유적을 상호 비교하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적 공백을 감수하여야만 하는 실정이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좀더 신빙성 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동일 유적에 형성된 부여 문화층과 속말말갈 문화층을 상호 비교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런 예로서 楊屯 大海猛 유적과 楡樹 老河深 유적이 적격이다.

大海猛 유적은 永吉縣 烏拉街鄕 楊屯에 자리잡고 있으며, 1971년에 처음 발견되어 지표조사와 시굴이 이루어졌고, 1979년, 1980년, 1981년 세 차례 발굴이 진행되었다.46)이 유적은 3개 층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층(제1기)은 西團山文化 晩期, 중층(제2기)은 漢代 즉 扶餘 문화기, 상층(제3기)은 말갈-발해 초기에 해당한다. 제1기 문화층은 퇴적층이 두터워 3차례 발굴로 반지하식 집자리 17기, 장방형 수혈토광묘 6기, 옹관묘 5기, 灰坑이 발굴된 데에 비해서, 제2기 문화층은 퇴적층이 얇아 灰坑만 몇 기가 발굴되었을 뿐이다. 제3기 문화층에서는 수혈토광묘 90기, 석곽묘(石壙墓) 2기, 회갱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비교하고자 하는 제2기와 제3기 문화층은 각기 생활유적과 고분유적으로 성격이 서로 다르고, 더구나 제2기 문화층은 내용물이 아주 빈약하여 상대적으로 유물이 풍부한 제3기 문화층과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양자를 서로 비교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하다.

그렇지만, 老河深 유적은 사정이 다르다. 이 유적은 楡樹市 大坡鄕 後崗村에 있으며, 1980년과 이듬해에 두 차례 발굴되어 보고서가 출간되었다.47)모두 3개 층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하층은 서단산문화 만기, 중층은 부여문화기, 상층은 말갈-발해문화기에 해당하여, 양둔 대해맹 유적의 양상과 비슷하다. 중층 문화는 발굴시에 鮮卑族 산물로 추정하였으나, 이제는 부여문화로 여기고 있는 추세이다.48)이 유적은 길림시로부터 북쪽으로 100km 가까이 떨어져 있지만, 유적이 송화강에 바짝 다가서 있으므로 당시에 수로 교통을 이용했다고 상정해본다면 이 거리감보다는 분명 가까왔을 것이다. 이런 여건으로 볼 때에 王城으로부터는 다소 떨어져 있던 부여의 또 다른 집단이 남긴 유적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두 차례의 발굴로서 최하층에서 집자리 2기, 중층에서 長方形 竪穴土壙墓 129기, 상층에서 石棺墓 7기, 土壙木棺墓 6기, 단순 土壙墓 24기가 조사되었다. 따라서 중층과 상층 모두 분묘유적인 데에다가 둘 다 발굴된 유구의 숫자도 많으므로, 상호 비교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중층과 상층의 중심 연대 사이에는 상당한 공백이 있다. 중층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五銖錢과 銅鏡이 있다. 오수전은 반쪽만 남은 상태로서 ‘五’자의 필획으로 보아서 漢代에 속한다고 한다.49)동경은 四乳四蟠紋鏡, 四乳八鳥紋鏡, 四神規矩鏡, 七乳七獸紋鏡 4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들도 모두 漢代에 유행하였던 양식이다.50)따라서 중층 유적의 중심 연대는 漢代가 되며, 좀더 범위를 좁힌다면 後漢代가 된다. 그리고, 부장품의 종류와 양식에서 명확한 차이가 나지 않고, 무덤 開口部가 모두 동일 층위에 조성되어 묘광 깊이도 대체로 비슷한 점으로 보아 조성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51)다음으로 상층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五行大布 동전이다. 이것은 北周 武帝 建德 3년(574)에 주조되기 시작하여 북주(557-581) 말기까지 사용되었으므로, 상층 연대는 6세기 후반에 걸쳐 있는 것이 확인된다.

결국 중층은 후한대에 조성된 부여 전기의 유적에 해당하고, 상층은 北朝 후기에 조성된 속말말갈의 유적에 해당하여, 두 층위 사이에는 300년 이상이나 공백이 있게 된다. 이러한 공백은 부여계 집단이 이곳을 떠나고 오랜 기간을 거친 뒤에 속말말갈족이 이 일대에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공백 상태를 보더라도 적어도 이 지방에서는 부여 집단이 속말말갈로 轉化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분 양식, 매장 방식, 부장품에서 양자를 비교해보겠다. <표 1>은 그 비교표이다.

                     <표 1> 老河深 중층 및 상층 비교표

 층위 

 

 

연 대 

 

고분 양식

           매장 방식

  부장품

     埋葬 人員

  葬具

2차장

화장

전형적

陶器

毁器현상

동물 희생

중층

後漢代 

장방형 수혈토광묘(129)

단인장(72), 남녀이혈합장(40), 1남2녀이혈합장(15), 남녀동혈합장(2)

목관(79)

없음

24기

雙耳陶壺

있음(철기, 구슬)

있음(馬牙, 馬頭)

상층

6세기 후반 전후

토광묘(24), 목관묘(6), 석관묘(7)

단인장(33), 2인장 또는 3인장(4)

목관(6), 석관(7)

27기

6기

筒形雙唇陶罐

없음

없음

우선 고분 양식을 보건대, 중층에서는 129기 모두가 長方形 竪穴土壙墓로서 79기에서 木棺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상층에서는 목관을 사용하지 않은 단순 土壙墓 24기, 石棺墓 7기, 木棺墓 6기가 발굴되었다. 그런데, 중층에서는 대부분 목관을 사용한 토광묘였다가 상층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목관이 없는 단순 토광묘가 주축을 이루게 된다. 이들이 동일집단이었다면 단순 토광묘 단계에서 棺槨을 사용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일반적 과정을 거꾸로 밟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매장 인원을 볼 때에, 모두 단인장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중층에서 합장 풍습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에서도 단인장에서 합장으로 나아가는 일반적 정황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 두 요소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은 다음에 지적하는 차이에 비교해 볼 때 그리 크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火葬 현상이 나타나는 비율은 두 층위 모두 거의 비슷하지만, 2次葬 현상만은 중층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상층에서 등장하고 있다. 아울러 부장품을 보더라도 중층에서는 毁器와 동물 희생 풍습이 발견되지만, 상층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양자의 매장 관념에 현격한 차이가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陶器를 보겠다. 중층에서 출토된 도기의 유형은 壺 93점, 罐 50점, 杯 64점, 豆 26점, 碗 18점, 盅 6점으로 전체 257점이고, 그 가운데 완형 또는 복원품은 각기 26점, 21점, 60점, 22점, 4점, 4점으로 전체 137점이다. 상층 출토의 器種은 罐 52점, 碗 2점이고, 그 가운데 완형 또는 복원품은 각기 37점, 2점52)이다. 따라서 중층에서는 壺, 杯, 罐이 주축을 이루고 그 뒤를 豆, 碗이 따르고 있는 반면에 상층에서는 전부가 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따라서 동일 집단 안에서 다양한 기종에서 단일 기종으로 변화해갔다고 한다면, 이 또한 자연스럽지 못하다.

중층에서 출토된 도기에서 가장 특색을 이루는 것이 罐, 豆와 함께 棺 위에 올려져 있던 雙耳陶壺이다(그림 1).53)형태는 끝이 둥근 口緣이 약간 외반되고, 대부분 짧은 목이 달려 있으며, 부른 배(鼓腹)에는 두 개의 가로띠 손잡이(橫橋狀耳)가 달려 있고, 바닥은 平底를 이룬다. 태토에는 모래가 섞여 있고, 灰黑色 계통이 주류를 이룬다. 복원된 26점의 壺 가운데 20점이 이 기형에 속한다. 다음으로 상층에서 출토된 도기에서는 筒形雙唇陶罐이 특징적이다(그림 2). 보고서에서는 세 유형으로 나누었지만 숫자로 보나 형태로 보나 가장 전형적인 것은 역시 第三型이다.54)이들은 二重口沿(雙唇) 형태를 띠고 입은 벌어져 있다. 배는 원통형이거나 약간 부르고, 바닥은 깊고 평저이다. 어깨와 배 윗부분에 문양이 있는 예도 많다.

중층을 대표하는 도기는 雙耳陶壺이고, 상층을 대표하는 도기는 筒形雙唇陶罐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과연 이들 도기는 상호 연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볼 차례이다. 먼저, 중층의 쌍이도호는 이에 앞서는 시대인 西團山文化期 도기들과의 연계성이 주목된다. 사실 長蛇山, 猴石山, 騷達溝, 星星哨, 大海猛 하층, 藍旗 小團山, 池水 南山 유적 등지에서 이와 유사한 壺들이 발견되었다(그림 1-1, 2).55)물론 부여시기에 속하는 泡子沿前山 유적에서도 이런 유형의 壺가 출토되었다(그림 1-3).56)따라서 雙耳陶壺는 서단산문화 단계로부터 부여 단계까지 계승되면서 발전되어 온 기형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57)

이에 반해서 상층의 筒形雙唇陶罐과 같은 기형은 앞 단계의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길림시에서 멀리 떨어진 동일 시기의 다른 靺鞨 유적들에 널리 퍼져 있다. 이 도기는 보통 筒形罐, 深腹罐, 長腹罐 등58)으로 불리는 말갈의 전형적 器物이다. 일반적으로 운위되는 ‘말갈식 도기’59)는 태토에 모래를 섞었고, 소성도는 중급 정도가 된다. 색조는 회갈색, 황갈색, 흑갈색이 많다. 대표적인 것은 罐으로서, 입이 크게 벌어지거나 약간 외반되고, 목은 대체로 짧으며, 몸통은 길쭉하면서 배가 약간 부른 형태이며, 바닥은 보통 平底이다. 대다수의 구연부에 융기문(附加堆紋)이 있고, 그 위에 누름무늬(捺捏紋)나 거친 새끼무늬(粗繩紋)가 시문되어 있고, 이중구연(重唇)의 형태를 띠는 것도 있다. 목과 어깨에도 빗으로 눌러 찍은 무늬(篦點紋), 물결무늬(水波紋), 突帶紋(凸弦紋) 등이 많이 나타난다.

靺鞨式 罐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입이 나팔 모양으로 크게 벌어져 배의 직경보다 큰 것으로서, 배가 다소 불룩하고 목은 가늘고 긴 편이고, 다른 하나는 입이 약간 외반되어 배의 직경보다 작고, 키가 크지 않고 목도 그다지 들어가지 않고 배도 약간 나온 상태이기 때문에 深鉢形에 가까운 편이다. 러시아의 디야코바(Дьякова О.В.)는 앞의 도기를 블라고슬로벤노예(Благословенное) 유형, 뒤의 도기를 나이펠드(Найфельд) 유형이라 부른 반면에 일본의 菊池俊彦은 ‘花甁形 토기’와 ‘壺形 토기’로 불렀는데,60)중국의 喬梁이 분류한 A型罐, B型罐과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61)

그런데, 입이 크게 벌어진 화병형 도기(그림 2-16,17,18,22)는 아무르강(黑龍江) 유역에서만 특징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반면에, 두번째 유형의 도기(그림 2의 나머지)는 아무르강 유역뿐 아니라 哈爾濱市 부근의 黃家崴子 유적, 吉林市 부근의 大海猛 유적 등 송화강 유역에도 널리 퍼져 있다.62)말갈 집단은 하나로 형성된 통일체는 아니었지만, 바로 후자의 도기가 이들을 서로 묶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63)     

그렇다면 이러한 유형의 도기가 말갈 지역에 두루 퍼져 있었던 것은 종족의 확산 과정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도기 양식의 전파에 불과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데레비얀코(Деревянко А.П.), 디야코바와 菊池俊彦은 두 유형 도기의 분포 양상을 토대로 말갈족의 발생과 확산을 추정하였다.64)따라서 전자의 입장에 서 있다. 실제로 길림시 일대에 말갈식 도기가 출현하는 것은, 이미 문헌 검토에서 지적하였듯이 물길의 확산에 따른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갈식 도기는 서단산문화-부여문화로 이어지는 계승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동쪽으로부터 서진해오던 물길족과 함께 이입되어 들어온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참고로, 물길족은 100년 정도의 짧은 기간만 문헌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들을 계승하여 나타난 말갈과는 고고학적으로 구별하기가 어려워 ‘물길-말갈’을 함께 다루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65)

그런데, 老河深 上層에서도 두 개의 가로띠 손잡이(橋狀橫耳)가 대칭으로 붙은 도기 2점(그림 1-12)이 출토된 것이 주목된다. 보고서에서는 이를 I型罐으로 분류하였지만, 大海猛 上層에서 출토된 I式橫耳罐 2점(그림 1-13, 14)과 거의 동일하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이러한 양식의 도기가 새삼 주목되는 것은 앞서 언급한 西團山文化-부여로 이어지는 雙耳陶壺의 연속선상에 있는 유물로 볼 수 있다면, 속말말갈 유적으로부터 부여의 계승 요소를 일부 발견할 수 있게 되어 사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노하심 상층 출토품은 2점 모두 점토질 태토(泥質)로 만든 흑갈색 도기로서, 한 줄의 음각줄무늬(陰弦紋)가 배 가운데에 돌려져 있다.66)대해맹 상층 출토품도 2점 모두 점토질 태토를 한 회색 도기로서, 음각줄무늬와 圓點斜線무늬가 역시 배 가운데에 등장한다.67)같은 층위에서 출토된 말갈식 도기들이 모래가 섞인 태토를 사용하고 있는 점과 구별되므로, 이들은 다른 문화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선 주목되는 것이 고구려 내지 발해 도기들이다. 먼저 集安 民主六隊 유적에서 출토된 발해시기의 泥質灰陶가 주목되는데(그림 1-11), 배 가운데에 가로띠 손잡이가 달려 있고 음각줄무늬도 하나 돌려져 있다.68)따라서 도면상으로 볼 때에 앞서 제시한 도기들과 아주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들 도기는 말갈 집단이 발해시대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하심 상층과 대해맹 상층이 발해시기까지 걸쳐 있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민주육대 도기는 무늬가 없는 점을 제외하고는 集安 氣象站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雙耳罐과 기형이 아주 유사한데, 이것도 역시 泥質의 黑灰色 도기로서 배 가운데에 가로띠 손잡이가 달려 있다.69)따라서 상기 도기들은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전통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들 고구려, 발해의 雙耳陶壺는 그 연원이 어디에 있는가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 고구려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공귀리유형토기 및 미송리형토기에서 연원하여 초기철기시대의 노남리형토기에서 그 초기 형태가 형성되었으니, 이 유형의 토기는 泥質胎土, 표면 마연, 종방향 또는 횡방향의 橋狀把手를 특징으로 한다는 지적이 환기된다.70)이렇게 고구려 토기의 발생을 고구려 중심지에서 찾는 것은 타당하지만, 길림 일대에는 부여 이래의 전통이 섞여 전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길림시 東團山에서 출토된 쌍이도호 1점은 泥質灰陶이고 輪製이며 배 가운데에 柱狀橋耳가 한 쌍 달려 있고, 배 아래쪽으로는 方格印紋을 가득 시문하였다.71)여기에 설명된 몇 가지 특징은 고구려 토기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릇 형태에서 볼 때에 西團山문화-扶餘로 이어지는 쌍이도호의 변화 과정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도 남겨두고 있다. 따라서 말갈 문화 속에 부여 전통의 殘迹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가 없다. 이러한 여운은 잠시 간직하면서 다음 절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IV. 粟末靺鞨 집단의 扶餘的 因素

이제까지 문헌 자료와 고고 자료를 검토하면서 속말말갈 집단의 원류가 부여계 집단에 있지 않고 물길계 집단에 있다는 사실을 다소 길게 논증해보았다. 그렇다면 속말말갈이 부여계 집단에서 발생하였다는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인지, 그리고 앞 절의 마지막에 언급한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부여계의 주장자에게는 속말말갈 지역이 과거 부여족이 살던 곳과 일치한다는 사실 이외에도 몇 가지 문헌적 논거를 더 가지고 있다. 첫째는 당나라에 설치되어 있던 靺鞨 羈縻州에 관한 다음 세 가지의 기록이다. 이들 세 사료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약간씩 다른 부분도 보여서 서로 비교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모두 인용문으로 제시하였다.

①靺鞨州三, 府三.

  愼州. <武德[618-626]初以涑沫烏素固部落置. 僑治良鄕之故都鄕城. 縣一, 逢龍.>

  夷賓州. <乾封72)中[666-668]以愁思嶺部落置, 僑治良鄕之古廣陽城. 縣一, 來蘇.>

  黎州. <載初二年[691]析愼州置. 僑治良鄕之故都鄕城. 縣一, 新黎.>

  黑水州都督府. <開元十四年[726]置.>

  渤海都督府.

  安靜都督府.

(ꡔ新唐書ꡕ 권43하, 地理志 7하, 河北道)

 

②燕州, ․․․ 舊領縣一, 無實土戶. 所領戶出粟皆靺鞨別種, 戶五百.

  愼州, 武德初置, 隸營州, 領涑沫靺鞨烏素固部落.

  夷賓州, 乾封中, 於營州界內置, 處靺鞨愁思嶺部落, 隸營州都督.

  黎州, 載初二年, 析愼州置, 處浮渝靺鞨烏素固部落, 隸營州都督.

(이상 ꡔ舊唐書ꡕ 권39, 地理志 2)

 

③燕州<歸德郡, 今理遼西縣.>, ․․․ 置在幽州, 領靺鞨, 本栗末<按, 栗末, 隋書作栗未, 文獻通考作粟來, 原本又作栗來, 疑來卽未字之悟(誤), 今從隋書改正.>靺鞨種也. 隋北蕃風俗記云, 初開皇中, 粟末靺鞨與高麗戰, 不勝. 有厥稽部渠長突地稽首者, 率忽賜來部․窟突始部․悅稽蒙部․越羽部․步護賴部․破奚部․步步括利部, 凡八部, 勝兵數千人, 自扶餘城西北擧部落向關內附, 處之柳城, 乃燕都之北.

  愼州<今理逢龍縣>, 唐武德初置, 隸營州. 領涑沫靺鞨烏<原本訛鳥, 據舊唐書改正.>素固部落.

  夷賓州<今理來蘇縣>, 唐乾封中, 於營州界內置. 處靺鞨愁思嶺<原本脫嶺字, 據舊唐書改正.>部落, 隸營州都督.

  黎州<今理新黎縣>, 載初二年, 析愼州置, 處浮渝靺鞨烏素固部落, 隸營州都督.

(이상 ꡔ太平寰宇記ꡕ 권71, 河北道 20)

이상의 사료를 통하여 당나라 영역에는 靺鞨 부락을 안치시킨 곳으로 愼州, 夷賓州, 黎州, 燕州의 4개 州와 黑水州都督府, 渤海都督府, 安靜都督府의 3개 府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安東都護府 관할 아래에 있었던 拂涅州, 越喜州都督府도 그 명칭으로 보아 말갈 부락으로 구성된 행정구역이었을 것이다.73)따라서 말갈 부락이 거주하고 있던 당나라의 행정구역에는 5州, 4府가 있었다. 이 가운데 불녈주는 拂涅靺鞨, 월희주도독부는 越喜靺鞨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나머지 3개 도독부는 당나라 영역 내부에 두었던 것이 아닌 명목상의 행정구역이었다. 더구나 발해도독부는 독립된 국가에 명목적으로 建置한 것이고, 안정도독부는 다른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그 연혁을 알 수 없다. 이에 따라 속말말갈과 관련된 것으로는 4州만 남게 되고, 그와 관련된 것이 위에 제시한 사료들이니 이를 <표 2>로 재정리하였다.

                   <표 2> 靺鞨 羈縻州 일람표

명칭

ꡔ新唐書ꡕ 기록

   ꡔ舊唐書ꡕ 기록 

ꡔ太平寰宇記ꡕ 기록 

설치 시기

燕州

 

粟皆靺鞨別種

栗末靺鞨種

愼州

涑沫烏素固部落

涑沫靺鞨烏素固部落

涑沫靺鞨烏素固部落

夷賓州

愁思嶺部落

靺鞨愁思嶺部落

靺鞨愁思嶺部落

黎州

 

浮渝靺鞨烏素固部落

浮渝靺鞨烏素固部落

이 4주는 모두 營州(현재의 朝陽) 관내에 있었지만, 정확한 소재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74)燕州는 ꡔ北蕃風俗記ꡕ에 인용되어 있듯이 粟末靺鞨 突地稽 일당을 받아들여 안치시킨 곳이다. 이 사실은 ꡔ新唐書ꡕ 지리지의 幽州 연혁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燕州는 원래 營州 관내에 속말말갈인을 두어 설치하였다가 武德 6년(623)에 幽州로 옮겼다고 한다.75)그러므로 ꡔ舊唐書ꡕ의 ‘粟皆靺鞨別種’은 부정확한 기록이 된다. 즉, ‘粟皆靺鞨’은 ‘粟末靺鞨’의 오류이고, ‘別種’은 단순히 ‘種’이라 쓰는 것이 정확할 것이며, 그렇지 아니면 별종이란 뜻을 ‘한 갈래’란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愼州에 이주시킨 말갈 부락에 대해서는 涑沫靺鞨과 烏素固部落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讀法이 있는가 하면,76)이를 하나로 이어서 읽는 견해도 있다.77)전자의 경우에는 두 종류의 부락을 한 곳에 안치시킨 셈이 되는데, 烏素固部落은 室韋 가운데에 동일한 명칭이 발견되어78)말갈과는 다른 종족 집단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涑沫靺鞨烏素固部落’이란 표현 방식이 이빈주, 여주의 경우와 동일한 점으로 보아서 전자보다는 후자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속말말갈에 속하는 오소고부락’으로 읽어내야 할 것이며, 이럴 경우 실위 부락의 명칭과 우연히 일치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다음 黎州의 기록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夷賓州는 단지 靺鞨 愁思嶺部落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말갈에 속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주, 신주, 여주에 있던 부락들이 모두 속말말갈인 것으로 보아 이빈주의 경우도 속말말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6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속말말갈 지역을 재차 공략해 들어감으로써 이들 세력은 분산되어 일부는 고구려에 저항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고구려에 투항하여 고구려 內地로 이주하는 양상을 보였다. 물론 다수 말갈족은 현지에 그대로 거주하였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건대 愁思嶺部落도 속말말갈에 속하였던 집단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黎州이다. 원래 여주는 愼州를 나누어 설치한 것이라 하면서, 이곳에 浮渝靺鞨 烏素固部落을 거주시켰다고 하였다. 이로 보건대 오소고부락은 속말말갈이면서 浮渝靺鞨로도 불렸던 집단이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서 浮渝란 말은 扶餘의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이란 발해 유민국가의 국왕 칭호79)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烏舍城 浮渝府 渤海琰府王으로 끊어 읽을 수 있는 것으로서 浮渝府는 扶餘府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당나라 영역에서 적어도 燕州, 愼州, 夷賓州, 黎州의 4개 州에 속말말갈 집단이 거주하였던 사실이 드러난다. 문제는 烏素固部落을 浮渝靺鞨 즉 扶餘靺鞨로도 언급하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 기록이 속말말갈의 원류를 부여계 집단에서 찾는 중요한 논거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만 유독 부여말갈로 표현하였을 뿐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속말말갈 가운데 부여계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속말말갈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여가 멸망한 후에 그 일부 유민들이 속말말갈의 한 부분으로 편입된 것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80)

부여계 주장자들이 중요 논거로 생각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突地稽를 扶餘侯로 봉한 사실이다. 이 기록은 ꡔ北蕃風俗記ꡕ와 함께 돌지계에 관한 주요 사료로 손꼽히는 ꡔ冊府元龜ꡕ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唐高祖武德二年[619])十月, 靺鞨首師突地稽遣使朝貢. 突稽者, 靺鞨之渠長也. 隋大業中, 與兄瞞咄率其部內屬於營州, 瞞突死, 代總其衆, 拜遼西太守, 封扶餘侯. 朝煬帝於江都, 屬化及之亂, 以其徒數百, 間行歸柳城. 至是通使焉. (ꡔ冊府元龜ꡕ 970, 外臣部, 朝貢 3) 

돌지계는 처음 隋에 귀부할 때에 右光祿大夫를 제수받았고, 大業 8년(612) 고구려 정벌에서 세운 공으로 遼西太守, 扶餘侯로 봉해진 것이다.81)문제는 이 때에 왜 부여후로 봉해졌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앞서 인용한 ꡔ太平寰宇記ꡕ 燕州條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돌지계가 扶餘城 서북쪽으로부터 귀부한 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돌지계가 부여계통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귀부하기 이전에 그가 거주하던 지역의 역사적 연고에 근거를 둔 것이다.82)물론 돌지계 집단이 앞의 烏素固部落처럼 부여계의 속말말갈 집단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를 근거로 속말말갈 전체가 마치 부여계 집단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분명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속말말갈 집단 내부에 부여 계통의 부락도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 절에서 속말말갈 유적에 등장하는 雙耳陶壺의 원류가 부여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긴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요소만 내세워서 부여계 집단으로부터 속말말갈이 형성되었다는 논리를 펼 수는 없다. 속말말갈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지 못하였고, 다양한 집단이 포괄되어 있었던 일정한 지역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사실을 검증해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서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사료를 다시 한 번 인용해보겠다. 

隋北蕃風俗記云, 初開皇中, 粟末靺鞨與高麗戰, 不勝. 有厥稽部渠長突地稽首者, 率忽賜來部․窟突始部․悅稽蒙部․越羽部․步護賴部․破奚部․步步括利部, 凡八部, 勝兵數千人, 自扶餘城西北擧部落向關內附, 處之柳城, 乃燕都之北. 

돌지계는 厥稽部의 渠長으로서 忽賜來部․窟突始部․悅稽蒙部․越羽部․步護賴部․破奚部․步步括利部까지 이끌고 수나라에 귀부하였는데, 그 규모는 勝兵이 수천 명에 달하였다고 할 정도로 컸다. 또 그가 출발한 지점은 부여성 서북쪽이고 정착한 곳은 柳城(현재의 朝陽)이었다. 이 기록으로 돌지계가 속말말갈의 ‘일부’인 8개 부락을 통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속말말갈의 영역 내에서 일정 지역을 담당하였던 渠長이었지, 속말말갈 전체를 거느린 최고대표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를 혼동한 견해가 일부 논문에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이들과 함께 앞서 지적한 烏素固部落과 愁思嶺部落까지 합친다면 최소한 중국에 귀부한 속말말갈 부락은 10개에 이른다.

그리고, 돌지계가 출발한 곳이 扶餘城 서북쪽이라 하였는데, 이 부여성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있어 왔다. 앞서 부여의 西遷 지역에 대한 몇 가지 설을 간단히 언급한 바 있지만, 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金毓黻․和田淸은 八面城 남쪽의 四面城, 松井等․日野開三郞은 農安 부근, 津田左右吉은 佟佳江 하류, 池內宏은 咸興 등을 주장하였고,83)근래에도 農安古城, 一面城, 西豊 城子山山城 등을 주장하는 설들이 제기되어 왔다.84)이에 비해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지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부여의 서천 후보지역으로 농안 일대가 가장 유력하므로, 일단은 부여성의 소재지를 農安 일대로 상정해두고자 한다.85)그렇다면 부여성 서북쪽에서 출발한 돌지계 집단은 현재 속말말갈의 중심지대로 비정되고 있는 길림시 일대와는 거리가 꽤 떨어진 곳에 거주하였던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속말말갈 핵심부락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부 논문에서는 마치 이들이 핵심부락이었고 심지어는 속말말갈의 거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중국으로 들어간 속말말갈에도 여러 부락이 있었듯이, 고구려로 들어온 집단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발해를 건국하였던 乞乞仲象(大祚榮) 집단과 乞四比羽 집단이 속말말갈 출신이었고,86)그밖에 많은 속말말갈인과 白山靺鞨人들이 고구려 용병으로 활약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이 속말말갈의 어느 부락에 속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전혀 알 수가 없다.

여기에 하나 덧붙일 것은 李多祚(654-707)의 기록이다. 그에 대한 전기가 이례적으로 두 唐書에 모두 실려 있고, 그의 墓誌銘도 1990년에 발굴되어,87)실상을 다소나마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열전에는 그가 중국에 들어온 靺鞨族 출신이라 하였는데 묘지명에는 蓋州人이라 하여 달리 표현하고 있다. 蓋州는 貞觀 19년(645)에 李勣이 고구려 蓋牟城을 빼앗고 설치한 州이다.88)따라서 645년 이전에는 고구려 땅이었던 곳이다. 이런 곳을 그의 출신지로 삼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의 묘지명을 좀 더 검토해보면 曾祖父 訥, 祖父 利, 父 辯이 모두 蒙州都督이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蒙州는 중국 남방의 廣西壯族自治區에 있는 蒙山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으로서, 貞觀 8년(634)에 비로소 몽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89)이 설치 연대로 보아 이다조의 조상들이 이곳의 도독이었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전기에는 그의 선조들이 靺鞨酋長을 세습하면서 黃頭都督으로 불렸다고 하였다.90)따라서 몽주도독은 황두도독과 비교해볼 수 있는 명칭으로 북방의 어느 지역의 명목적 행정책임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이 일정 기간 거주하였던 곳이 蓋州였을 것이다. 그가 遼陽郡王이었던 사실과 더불어, ꡔ舊唐書ꡕ 列傳에 ‘三韓의 貴種’이라 한 것은 아마 이를 반영한다.

이렇게 된다면 李多祚 가문은 고구려 영역 안에서 말갈추장을 유지하다가 당나라에 귀속하였던 집단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일찍이 원주지였던 말갈 지역에서 고구려 요동 지역으로 귀부하였다가 다시 당나라로 귀화한 가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이 가문이 속말말갈 출신인지 백산말갈 출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걸걸중상이나 걸사비우의 집단처럼 전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까지 중국 및 고구려에 귀화하여 활동하였던 속말말갈을 검토해보았다. 아무래도 속말말갈의 주축은 原住地에 남아 있었을 것이지만, 이들 집단의 구성에 관한 자료는 전무한 상태이다. 단지, 勝兵이 수천 명에 달하였고, 고구려와 접해 있으면서 매번 침략하는 용맹한 집단이었다는 정도만이 전해질 뿐이다.91)따라서 이들의 상황은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룬 적이 있으므로92)여기서는 간단히 재인용하여 정리하는 데에 그치겠다.

                    <표 3> 속말말갈 무덤 통계표    

         유적

  항목

大海猛 上層

  査里巴

老河深 上層

土壙墓

  69/70  (99%)

43/47 (91%)

30/37 (81%)

木質 棺槨 확인수

   7/40  (18%)

38/47 (81%)

  6/37 (16%)

火葬 

   2/49  ( 4%)

33/47 (70%)

  5/37 (14%)

2次葬 

  25/70  (36%)

15/47 (32%)

28/37 (76%)

多人葬(3인 이상)

   7/40  (18%)

  9/47 (19%)

  1/37 ( 3%)

筒形罐(/陶器 總數)

111/167 (66%)

23/51 (45%)

33/37 (89%)

鼓腹罐(/陶器 總數)

  18/167 (11%)

16/51 (31%)

  2/37 ( 5%)

銙板1(帶銙型)

222

21

  0

銙板2(牌飾型)

  56

56

  0

 

<표 3>은 길림시 일대의 속말말갈 고분군 자료를 비교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들은 土壙墓를 주축으로 하면서 筒形罐과 鼓腹罐같은 말갈식 도기가 주로 부장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이지만, 木質 棺槨의 사용, 火葬․2次葬․多人葬의 매장법, 銙板 출토에서 서로간에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모두 속말말갈이 남긴 유적이라 하더라도 그 내부에는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집단들이 산재해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중국에 귀부한 10개 속말말갈 부락도 역시 이와 같이 문화적 독자성을 지닌 집단들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 방면의 속말말갈 집단들을 추적해보았다. 결국 다양하고 독자적인 다수 집단의 총체가 속말말갈이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여 遺民들로 이루어진 말갈집단도 속해 있었을 것이다. 이를 착각하고 마치 속말말갈의 족원을 부여에서 찾는 것은 필경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결론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V. 맺 음 말

속말말갈은 한국사에서 보면 異種族 집단이었으면서도 부여, 고구려, 발해와 관련되면서 어찌 보면 한국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세력이었다. 더구나 발해 건국 집단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던 종족이기도 하였으므로, 이들의 정체를 규명해내는 것이 마치 발해사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처럼 이해되어 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속말말갈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발해사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들을 다루어왔던 경향이 있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되다 보니 속말말갈의 원류가 부여계였다고 하면 마치 한국사에 유리한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종족 집단은 그 자체로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 다음에 한국사의 다른 부분과 연계시켜 고려하여야 한다.

그 동안 속말말갈의 원류를 부여에서 찾는 견해와 물길에서 찾는 견해로 양분되어 왔다. 그러나 부여 거주지의 변천 과정과 물길의 동향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부여설은 성립되기가 어렵다. 346년 이전에 백제(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부여는 그 중심지였던 길림시 일대를 벗어나 서쪽으로 옮겨갔고, 이 자리는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가 5세기 중후반에 물길 세력이 동쪽으로부터 밀고 들어와 이 땅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6세기 중반 무렵부터 靺鞨 명칭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속말말갈의 모태는 勿吉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에 재차 진출한 것은 6세기 말부터였다. 그리고 부여는 494년경 서천해 있던 곳에서 물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고, 그 지배층은 고구려로 투항하였다. 이런 역사적 정황을 보더라도 粟末靺鞨은 勿吉을 모태로 형성된 집단이었다.

이것은 고고학 자료에서도 증명되는 것이니, 부여 유적으로 지목되는 유적에서는 雙耳陶壺가 지표적인 도기로 출토되고 있는 반면에 속말말갈을 포함한 전체 말갈 유적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말갈식 도기라고도 불리는 筒形罐(筒形雙唇陶罐)이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부여와 말갈의 문화 전통이 상이한 것을 반영한다. 동시에, 동쪽 끝의 黑水靺鞨에서 서쪽 끝의 粟末靺鞨에 이르기까지 말갈식 도기를 매개로 한 문화적 공통성을 보이는 것은 이들의 종족적 속성이 동일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속말말갈이 부여에서 轉化된 것이 아니라 다른 말갈족과 마찬가지로 물길에서 전화된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밖에 고분 양식, 매장방식, 부장품에서 부여와 속말말갈의 고분군을 비교하더라도 동일한 설명을 도출해낼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속말말갈 집단에 부여 유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扶餘故地에서 속말말갈이 형성되었고 나중에는 부여의 西遷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므로, 이들이 부여 세력을 흡수 동화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烏素固部落은 속말말갈이면서도 부여말갈로도 불렸으니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집단이다. 물론 이보다 더 많은 숫자가 부여계 속말말갈 부락에 속하였을 것이지만, 기록은 더 이상의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여계 집단이 존재한다고 해서 속말말갈 전체를 부여계로 규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속말말갈은 무수한 부락으로 구성되어 아직 통일체를 구성하지 못하였던 지역공동체였으니, 그 중 일부는 고구려나 중국으로 흘러들어갔고 대다수는 길림시와 農安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한 속말말갈의 주축 세력은 역시 물길계였고, 단지 그 일부로서 부여계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해를 해야만 문헌적 기록 및 고고 자료와도 부합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본론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이제 한국고대사는 너무나 한정된 사료에만 매달려 무수한 추측만 제기할 때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시야를 더 넓혀 중국사나 일본사를 함께 다루면서 고대사의 연구 활동 분야를 더욱 확대해나가지 않으면 좁은 우물 안에 갇혀 버리게 될지 모른다. 그런 한 방편으로 만주 지방뿐 아니라 중원에서 조사되고 있는 고고 자료들에도 예의 주시해나갈 필요가 있다.

编辑:李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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