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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文化史的研究状况与课题


宋基豪
2007-04-12 16:00:31 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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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문화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

무엇을 문화사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복잡한 사안이다. 이에 대해서 한국사학계에서 근래에 학술토론을 벌인 적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할 만하다.1)문화란 넓은 의미로 자연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간 활동 전체를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정치․경제․사회 등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학문과 문학․예술․사상과 종교 등의 정신문화를 가리킨다. 따라서 문화사의 영역도 여기에 조응시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발해 문화사로 시야를 돌린다면 이와 같은 정의는 한갓 부질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료가 워낙 적다보니 아직까지는 자료의 취합에 그치는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의의 전통적 정의에 부합되는 영역마저도 복원해내기가 벅찬 실정이다. 위에 제시한 영역에서 문학 작품은 그래도 약간 남아 있는 편이고, 예술 가운데 미술과 음악에 관한 자료도 그런대로 꾸려볼 수 있을 정도이며, 종교에서도 불교 부분을 추정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 나머지 분야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사상사 분야는 그 편린마저도 찾기가 어렵다. 이처럼 문화의 일반적 정의마저도 총족시키기 어려운 것이 발해 문화사이다.

이런 사정으로 발해 문화사의 구성 형식에도 변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고고 자료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핵심적인 문화의 영역인 상기 분야들은 그 다음으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고 자료의 정리에 매달리다 보면 분량이 한없이 늘어날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간단히 정리하고 문화의 주축 영역들에 대한 연구 동향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보도록 하겠다.

 I. 각국의 연구 개황과 문화 총론

 발해 문화사와 관련된 논문과 저서를 국가별로 뽑아보면, 중국 362편, 북한 63편, 남한 71편, 러시아 112편, 일본 105편으로 모두 713편에 달하며, 이는 전체 2477편 가운데 28.8%를 차지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하여 통계표를 작성하면 다음 표와 같다. 

               <> 발해 문화사 논저 통계표 (2002년말 기준) 

 

 

문화총론     

            유적과 유물

문학,

문자

불교

유학

풍속,음악, 놀이, 복식

기타

합계

비율(/전체논문수)

고고일반

성터

무덤과벽화

불교유적유물

주거지와 건축

기타유적

유물

중 국

 17

 82

 43

  61

 28

 36

  3

 48

 11

  5

  9

 17

  2

 362

32.7%(/1106)

북 한

  1

 11

  9

  11

  4

 10

  2

 14

  0

  0

  0

  0

  1

  63

46%(/137)

남 한

  4

 13

  2

   9

 17

  5

  0

  3

  3

  4

  0

  8

  3

  71

15.7%(/451)

러시아

  2

 32

 23

   0

  6

 10

  1

 35

  2

  0

  0

  0

  1

 112

60%(/186)

일 본

 11

 21

 23

   3

 10

  3

  0

 20

  7

  2

  0

  3

  2

 105

17.6%(/597)

합 계

35

159

100

84

65

64

6

120

23

11

  9

 28

9

 713

28.8%(/2477)

 

이 표를 보게 되면 우선 국가별로 문화사의 비중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와 북한이 각기 60%, 46%를 차지하고, 중국은 32.7%, 일본은 17.6%, 남한 15.7%를 차지하여 그 뒤를 잇고 있다. 언뜻 보면 발해 문화사에 대한 관심이 국가별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렇게 60%에서 15.7%까지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실제로는 고고 현장을 확보하고 있느냐 여부에 기인한다. 그러기에 러시아, 중국, 북한의 비율이 높고, 남한과 일본이 낮게 나타난다.

또 러시아가 중국보다 높은 것은 이들이 문헌보다는 주로 고고 자료에 의존하여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해주 유적에 대한 역사 문헌 정보가 거의 없으므로 발굴 종사자들의 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발굴 조사 및 연구를 제외한 순수한 의미의 문화사, 즉 <표>에서 유적과 유물의 항목을 제외하면 중국의 글이 압도적으로 많게 되고, 그 다음으로 일본과 남한이 뒤따르며, 이에 비해서 북한과 러시아에서의 연구 숫자는 아주 소략하다. 러시아에서는 문헌 자료보다 발굴에 따른 물질 자료에 의존하다보니 문학이나 불교, 유학 등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고, 북한에서도 개설서를 제외하고는 上部構造에 대한 연구에 소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또 북한에서는 ≪력사과학≫과 ≪조선고고연구≫로 연구 발표 지면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2)

이제 <표>에 설정된 항목 순서로 연구 내용을 검토해볼 차례이다. 먼저, 문화 총론으로 분류된 글들은 발해 문화에 대한 전반적 서술이나 이와 관련된 기본 시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발해 문화 개설서로는 朱榮憲의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가 대표적인데, 그 내용은 ‘제1편 유적과 유물’에서 도시와 건축, 무덤, 유물을 다루고, ‘제2편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에서 무덤으로 본 계승관계, 도시와 건축 및 각종 유물을 가지고 본 계승관계를 다루고 있어서, 본격적인 문화사 책이 아니라 고고 연구서에 해당된다. 方學鳳의 ≪발해문화연구≫(이론과실천, 1991)가 국내에서 출간되었지만, 자신의 논문들을 모아놓은 데에 불과하여 체계적이지 않다. 근래에 方學鳳․鄭永振이 편집한 ≪渤海文化硏究≫(吉林人民出版社, 2000)도 여러 사람의 논문을 실은 것이다.

그 다음으로, 기본 시각 문제를 다룬 글들은 추후에 언급할 것이므로 일단 뒤로 미루도록 하겠다.

II. 고고 연구 현황 

중국에서는 1980년대 이래로 省․市․縣 단위로 유적 조사를 세밀히 시행하여 그 결과를 시리즈로 간행하였으니, 吉林省의 경우에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 조사를 시행하고 1988년 이래 49책의 각 시․현 ≪文物志≫를 완간하였고, 1991년에는 이를 종합하여 ≪吉林省志≫文物志篇(吉林人民出版社, 1991)을 발간하고, 1993년에는 國家文物局에서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中國地圖出版社 1993)을 발간하여 자료의 종합화․체계화를 꾀하였다. 이와 동일한 작업은 黑龍江省에서도 진행되고 있어서 依蘭縣과 같은 縣文物志가 간행되었고, ≪黑龍江省志≫文物志(黑龍江人民出版社, 1994)도 출간되었다. 이러한 자료집을 통하여 발해 유적의 전체적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연해주의 역사 유적 및 문화 유적≫(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극동민족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1991)이란 자료집을 간행하였으니, ‘제2부 고고 자료’에서 연해주 행정구역별로 유적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고 도면도 일부 실려 있어 역시 전체 개황을 파악하는 데에 소중하다. 북한의 경우에 자료집을 내지는 않았지만, 궁성희가 작성한 <조선력사유적유물 지명표> 시리즈 가운데(≪조선고고연구≫ 1994-1․2․3, 1995-4) 발해 유적들이 게재되어 있어 중요한 참고가 된다.

이밖에는 개별적인 유적에 대한 조사 또는 발굴 보고, 그리고 연구사가 중심을 이룬다. 그렇지만 발굴 보고서의 경우에 대부분이 簡報 형태에 머무르고 있어서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최초의 본격적인 보고서로는 193334년 발굴 성과를 집대성한 ≪東京城 -渤海國上京龍泉府址の發掘調査-≫(東亞考古學會, 東京․京都, 1939)가 있다. 이 당시 발굴품은 현재 일본 東京大學 등에 분산되어 보관되어 있고, 발굴 때에 찍은 사진들도 동경대학 고고학연구실에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일제시대에 간행된 보고서에는 ≪半拉城 -渤海の遺蹟調査-≫( 齋藤優, 琿春縣公署, 1942)도 있는데, 이 책은 추후 增補되어 ≪半拉城と他の史跡≫(1978)으로 복간되었다.

해방 이후의 정식 발굴서로는 중국과 북한의 공동 발굴 결과물인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1963~1965)≫(사회과학원출판사, 1966)와 ≪六頂山與渤海鎭 -唐代渤海國的貴族墓地與都城遺址-≫(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7)가 있다. 이 두 책은 공동으로 집필된 것이었으나 발간 과정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진 부분이 발견된다.3)그리고 牡丹江 하류에 蓮花수력발전소 댐 건설을 계기로 수몰되는 지역에 대한 구제 발굴을 199296년 사이에 진행하였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유적에 대한 발굴 보고서인 ≪河口與振興 -牡丹江蓮花水庫發掘報告(一)-≫(科學出版社, 2001)가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중요한 발해 유적이 실려 있다. 그 외에는 중국에서 간행된 정식보고서가 없는데, 정효공주 무덤 발굴보고서는 이미 원고가 완성되어 있지만 경비 마련이 되지 않아서 발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보리소프카 절터에 대한 보고서가 발굴이 끝난 1972년으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뒤에 국내 학회의 도움으로 ≪러시아 연해주 발해 절터≫(학연문화사, 1998)란 명칭으로 간행되었고, 국내학자와 공동으로 진행된 연해주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 결과 보고서도 ≪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대륙연구소, 1994)과 ≪연해주에 남아 있는 발해 -沿海州 渤海遺蹟 調査報告-≫(高麗學術文化財團, 1999)란 명칭으로 간행되었다. 근래에는 일본의 田村晃一을 중심으로 연해주 유적을 조사하여 지속적으로 보고서를 간행해내고 있다.4)이러다 보니 북한 지역의 발해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가 한 권도 없는 셈이 되는데, 이것은 ≪조선유적유물도감≫ 8(발해편, 외국문종합출판사, 1991)과 국내에서 출판된 ≪동해안 일대의 발해 유적에 대한 연구≫(김종혁, 중심, 2002)가 어느 정도 그러한 아쉬움을 채워준다. 한편, 일본에서도 발해 관련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小嶋芳孝가 이를 지속적으로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5)

발해 유물 전시회는 서울대박물관에서 1982년과 1990년 두 차례 소장 유물 전시회를 열었고,6)소장 유물에 관한 간단한 보고서도 간행하였으며,7) 2003년 7월에는 동경대학 유물을 대여해와서 다시 한 번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일본에서도 러시아 발굴 유물을 들여와 1994년에 전시회를 연 적이 있고,8)발해와 관련된 일본의 유적과 유물이 소개된 전시회도 1990년과 1996년 두 차례나 石川縣에서 개최되었다.9)이에 비해서 중국이나 북한의 발해 유물은 아직 접근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이밖에 발해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를 한 것으로는 중국측의 ≪東北古代民族考古與疆域≫(張博泉․魏存成 主編, 吉林大學出版社, 1998)과 ≪渤海遺迹≫(朱國忱․朱威, 文物出版社, 2002), 러시아측의 ≪발해(698~926년)와 러시아 극동의 종족들≫(샤프쿠노프 에.붸. 책임 감수, 과학출판사, 모스크바, 1994)10)을 참고할 수 있고, 북한측의 것으로는 위에 제시한 김종혁 저서를 들 수 있다.

발해 유적에는 성터, 무덤과 벽화, 불교 유적, 주거지와 건축 등이 있고, 여기서 출토된 유물도 상당수가 된다. 이들 각 분야에 대한 연구가 문화사 분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지면 제한으로 생략하고 앞에 제시한 통계표로 대체하겠다. 

III. 문화사 연구 현황

 고고 연구를 제외한 다른 문화사 방면의 연구는 아주 빈약한데, 여기서는 문학과 문자, 불교, 유학과 교육, 풍속․음악․놀이․복식, 기타로 나누어 개관해보겠다.

먼저 문학과 문자를 살펴보자. 발해 문학 작품은 다른 사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문장 형식으로 된 것은 거의가 외교관계와 관련하여 보낸 글들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작품이라 할 수는 없지만, 발해인이 작성한 문장이라는 의미에서 그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당나라에 보낸 賀正表 1편을 제외하고는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23편의 國書 및 中臺省牒이 전해지고 있다. 이보다는 私的인 문장에 속하는 것으로 釋貞素가 靈仙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詩에 붙인 序가 있고, 貞惠公主와 貞孝公主의 묘지명이 있다. 詩로는 석정소가 지은 것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에 파견된 사신들이 남긴 것으로서 모두 9수가 전해진다. 멸망 후에는 王庭筠을 비롯한 遺民 作家들이 文名을 떨치기도 하였다.

자료가 일본에 많이 남아 있는 만큼, 일본학자들은 발해와 일본 사이의 문학 교류란 측면에서 접근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서 제일 많은 글이 발표된 중국에서는 주로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차원에 머무르면서 주로 唐代 文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표한 글은 없고, 남한에서는 趙東一이 한국문학사를 서술하면서 ‘남북국시대의 문학’을 처음으로 설정하였으며, 金武植은 작품들을 분석하여 초기에는 騈驪文 형식을 충실히 따르다가 후기에 갈수록 문장 호흡이 자유로워진다는 점을 지적하였다.11)

발해 문자에 대해서는 기와와 도기, 벽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대상으로 과연 고유문자가 있었는지 여부를 따지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고유문자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어려우며 역시 다른 국가들처럼 한자 사용이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번째로 佛敎에 관한 연구이다. 발해 불교 사상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하므로 이 방면의 서술은 대체로 절터와 불상을 중심으로 한 고고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에서 발표된 何明, 關金泉, 박룡연 등의 논문이 그러하다.12)여기서 나아가 宋基豪는 문헌과 고고 자료를 토대로 발해 불교의 전개과정을 복원해보고자 하였고,13)許英子와 文明大는 발해에 성행한 불교 종파를 추정하였지만 현존 자료만으로 과연 가능한지는 의문이다.14)유민의 불교 문화가 금나라에 영향을 준 사실을 밝힌 外山軍治의 논문도 주목할 만하다.15)이 방면에서도 북한의 논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번째로 儒學과 敎育에 관해서는 중국의 논문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두 공주의 묘지명 분석을 통하여 儒家思想의 영향을 밝힌 鄒秀玉의 글이 대표적이며,16)그밖에는 개설서에 정리되어 있는 정도로 개략적인 것들이다. 발해 敎育에 대한 글들도 역시 그러하다.

네번째로 풍속, 음악, 놀이, 복식에 관한 것이다. 풍속과 놀이로는 馬球(擊毬), 婚喪儀禮, 女性의 지위 등에 관한 개괄적인 글들이 있다. 음악도 渤海樂에 관한 자료 정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일본의 雅樂 ‘新靺鞨’이 과연 발해에서 전래된 음악인지에 대해서 酒寄雅志와 石井正敏 사이에 상반된 의견을 개진하고 있어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17)服飾에 대해서는 金玟志의 자세한 고찰을 통하여 그 면모가 많이 밝혀졌다.18)

마지막으로 書藝, 미술, 도교 사상, 샤마니즘에 대한 시론적인 글들이 있으나, 매우 소략한 편이다.

 IV. 연구의 시각과 과제

 발해 문화사 연구에서 큰 쟁점이 되는 것은 별로 없다. 발해사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이 발해의 歸屬 問題이므로 정치사적, 종족사적 연구에 온 역량이 쏠려 있고, 또 남아 있는 사료가 외교관계 자료이므로 일본 또는 당나라와의 대외관계에 치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에 비해서 문화사 방면에 대한 연구는 深度가 그리 깊지 못하고 발굴조사 자료를 정리하고 소개한 것이 많다. 따라서 큰 논쟁거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견해 차이를 보이는 분야는 발해 문화에 대한 시각 정도인데, 이것은 연구자 개인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별로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대체로 중국학자들은 발해 문화의 靺鞨的 基盤과 당나라의 影響에 시각을 고정시키고 있는 반면에, 남북한 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은 高句麗的인 요소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에 비해서 러시아 학자들은 말갈적 요소를 중심에 두면서도 발해 문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因素를 지적하고 있다.

발해 문화에 대한 고정된 인식 태도는 발해의 실상을 파악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발해 고분 연구의 예를 들어서 지적한 바가 있으니,19)그 주된 내용은 이러하다. 발해 문화의 원류를 규명하는 기왕의 연구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하나는 말갈 문화를 무시하면서 오직 高句麗 계승국으로서 발해 문화를 바라보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와 반대로 말갈과 발해를 일체화시키면서 고구려를 이들로부터 떼어내려는 태도이다. 첫째 경향성은 북한의 연구에서 특징적이며, 둘째 경향성은 중국의 연구에서 특징적이다. 이들은 이러한 전제 때문에 발해 고분을 연구할 때에도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자료 왜곡 경향마저 보인다. 예를 들어서 六頂山 古墳群에 말갈적 전통을 지닌 土壙墓가 소수 발굴되었는데, 중국측에서는 많다고 지적하는 반면에 북한측에서는 아예 무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때문에 중국은 吉林市 일대의 고분 변화 과정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粟末靺鞨 土壙墓 -> 粟末靺鞨 石墓로의 변화 과정을 겪은 뒤에 六頂山 고분군의 단계로 나아간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오히려 육정산 고분군의 석묘가 길림시 일대의 속말말갈족에게 영향을 주면서 토광묘에서 석묘로 변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적이다. 다음으로, 북한에서처럼 육정산 고분군이 고구려적인 요소만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석묘의 구조나 내외부 시설 등에서 고구려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지만, 棺槨의 사용․火葬이나 多人葬․2차장 및 獸骨 공반과 관련된 매장 습속, 말갈식 陶器라고 하는 筒形罐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부장품 양상에서 말갈적인 요소도 많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발해사 연구자는 기왕의 어떠한 전제에도 구속되지 않고 발해, 고구려, 말갈 세 가지 요소, 나아가 러시아 학자들이 주장하는 더 많은 요소들에 유연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만 제대로 된 발해 문화사를 엮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발해 문화 시각과 관련된 논문들을 살펴보겠다.

먼저 중국에서 발해 문화의 성격을 논한 글이 10여 편이 있는데, 대부분 문학이나 회화, 조각 등과 같이 각 부문별로 발해 문화를 정리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또한 당나라의 영향과 함께 말갈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臺灣에서 발표된 韓道誠 논문을 비롯하여 중국의 李殿福, 魏存成, 張高, 劉曉東 등이 그러하다.20)예를 들어서 李殿福은 1981년의 글에서 “발해는 당 문화를 이룬 한 부분이다. 발해 문화를 독립된 문화라고 하거나, 다른 민족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거나, 某某 문화를 계승하였다고 하는 따위의 설명은 모두 착오이다. 발해는 당 왕조의 1개 州로서 冊封을 받았고 당에 臣屬하였던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 속말말갈인은 발해의 주요 민족으로서 당 왕조 봉건제국 多民族大家庭의 한 성원으로서, 발해 문화는 중화민족문화사의 1개 조성 부분이며, 중화민족 공동노동지혜의 結晶이다”고 결론을 맺었으며, 魏存成은 1991년의 글에서 “발해정권은 말갈족을 주체로 한 민족정권인 동시에 당나라 중앙정권의 책봉을 받아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정권이다. 때문에 발해문화는 의심할 바 없이 곧 당조때 중국력사문화의 한부분이다. ․․․우리들이 당조문화를 이야기하거나 중국고대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필연적으로 발해문화를 말하게 되며 동시에 오직 발해문화를 당조문화 및 중국고대 전통문화의 정체속에 넣어야만이 더욱 깊고도 투철하게 말할수 있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었다. 아울러 劉曉東의 글에서는 발해문화가 부단히 중원의 唐 文化에 근접 동화되어간 현상을 다루었고, 張高의 글에서는 말갈의 연장선에서 발해를 다루다보니 발해 문화의 시간적 상한을 563년 말갈족의 출현부터로 잡는 무리를 범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 요소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거나 왜곡되는 현상이 보인다. 孫進己는 발해문화가 대량의 당 문화에 속말말갈과 고구려 문화가 융합되어 성립되었다고 지적하였다. 魏存成도 山城과 平地城의 결합, 蓮花紋 瓦當, 封土石室墓, 四耳展沿壺 등에서 고구려의 영향이 발현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발해 초기에는 고구려 특징이 남아 있었지만 文王부터는 당 문화를 크게 받아들임으로써,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21)그래도 이들은 고구려 문화 요소를 긍정하는 편이지만, 다른 글에서는 이 요소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 형편이며, 심지어는 李殿福의 글에서처럼 왜곡된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그는 1981년 글에서 山城을 설치하는 것은 중원과 다른 것으로서 발해에 고유한 것이라고만 설명하였고, 封土墓도 고구려 무덤과 현저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와당도 고구려적이라 하면서 후기의 와당은 오히려 중국 西安 출토품과 유사하다고 지적하였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오로지 고구려 전통을 추적하는 데에 열중해왔다. 일찍이 朴時亨은 “발해는 그 주민, 령역, 주권의 일체 면에서 다 고구려의 후계자인 동시에 또 문화적 면에서도 틀림 없이 그의 훌륭한 계승 발전자였다”고 결론을 내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란 명제를 제시하였고, 이것은 朱榮憲의 고고학 연구를 통하여 “발해와 고구려는 혈통관계를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무덤의 째임새와 묻기가 모두 같으며 생활풍습을 반영하는 살림집과 그들이 일상적으로 쓰던 그릇과 무기 같은것은 물론 기와나 조각품들이 서로 공통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발해는 고구려의 혈통과 풍습 및 문화를 직접 이어받은 나라임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폭넓고 깊이있게 증명하여 준다. 따라서 일제어용학자들과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발해는 말갈족이 세운 나라고 그 문화가 높았던것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것은 력사에 대한 심한 외곡과 날조인것이다”22)고 강조하였다. 이 명제는 그 후에도 지속되었고 1980년 후반부터는 더욱 강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고구려 이외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극단성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서 발해 靈光塔은 중국의 塼塔 양식을 받아들인 것이 분명한데 이를 두고 중국의 탑과는 다르고 우리나라 탑의 특징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고 하거나, 발해 5京制가 당나라 제도가 아니라 고구려 5部․5京制(사실 고구려 5경제도 허구이다)를 받아들였다고 하였고, 발해 三彩가 唐三彩가 아닌 고구려 色釉陶器로부터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고, 발해 上京城마저 당나라가 아닌 고구려 平壤城과 통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23)그런가 하면 고려 靑磁도 발해 청자를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도 보인다.24)이들은 모두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일찍이 李龍範이 “渤海문화라고 하지만은 이상과 같이 그 문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그것은 高句麗系 중심의 문화이었으며 그 정치․경제․사회적 신분상의 지배를 받고 있던 靺鞨系의 문화는 아니었다”25)고 결론을 내린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교과서와 通史 모두 고구려적인 요소를 강조해왔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로서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도 고구려 요소에 관심을 많이 기울여왔으니,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기술한 그들의 역사 기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이것은 고구려와 발해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친 국가라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다. 근래에 출간된 石井正敏의 저서도 고구려 계승국이란 시각에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26)고구려 문화와 발해 문화의 연결고리를 제시한 논문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三上次男의 글로서, 그는 상경성 궁전의 온돌 장치, 횡혈식 석실봉토분, 와당 등에서 고구려 요소를 발견하였고,27)앞서 언급하였듯이 八連城(半拉城) 출토의 二佛竝坐像을 통하여 고구려 이래의 신앙이 발해 東京 지역에 지속되었음을 밝혔다.

러시아에서는 발해를 靺鞨國家로 보고 있다. 디야코바(Дьякова О.В.)는 아무르강 유역의 말갈 도기와 발해 도기를 동일선상에 놓고 연구를 하고 있어 발해 도기에서 말갈적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28)발해 문화의 전반적 특성을 지적한 학자는 샤프쿠노프(Шавкунов Э.В.)로서, 그는 좀더 다양한 요소를 제시하였다. 그도 “발해는 중국 사료에 勿吉 또는 靺鞨이라 적혀 있는 퉁구스語 種族인 무크리가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룩한 국가이다”고 정의를 내리면서도, 발해 영토에는 고구려인, 위구르인, 실위인, 소그드인 등 다양한 종족이 살았음을 지적하였다.29)그는 다른 글에서 발해 문화에 고구려 및 중국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건국자인 말갈족이 오래전부터 접촉해왔고 건국 뒤에는 그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들 요소를 차용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발해는 말갈족을 기본으로 하는 다민족국가로서, 남부에는 고구려인이 우세하였고, 남서․서․북서부에는 말갈족과 함께 몽골語 種族인 거란과 실위 및 突厥語 종족인 위구르족이 거주하였고, 북동부에는 니브히語 종족이 거주하였고, 동부에는 아이누어 종족인 窟說 또는 苦夷가 거주하였다”고 지적하였으며, “이밖에 발해 곳곳에 소규모의 이란語 종족인 소그드인(오늘날 타지크인의 조상)의 거류지가 있었으니, 이들 덕택에 발해 문화에 소그드, 호탄, 이란 문화에 특징적인 요소들도 자리를 잡았다”고 언급하였다.30)이러한 시각은 한․중․일에서 강조하는 당나라 요소나 고구려 요소를 희석시키면서 만주․연해주의 소수민족과 중앙아시아 민족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상 각국에서 발해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를 살펴보았다. 크게 보면 한국과 중국의 시각이 상반되면서, 러시아에서 제3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반된 두 나라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 발해사에 대한 정의이다. 중국에서 “발해는 속말말갈인이 주체가 되어 건립하여 唐朝에 예속되었던 지방민족정권(是以粟末靺鞨人爲主建立的隸屬于唐朝的地方民族政權)”31)이라는 틀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에, 북한에서는 “발해국은 고구려강국이 멸망한후에 그 고구려 사람들에 의하여 옛 고구려의 령토우에 다시 세워진 봉건국가였다”32)는 생각에 흐트러짐이 없다. ‘속말말갈 주체’의 ‘지방세력’이라는 渤海像과 ‘고구려인이 세운’ ‘봉건국가’라는 渤海像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지경에 있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문화의 다양성을 찾을 수 없고, 결국은 발해 문화의 진면목을 외면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발해 문화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각에서 해체하여 분석하다가 발해 고유의 문화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게 된 것이다. 200년 이상을 유지해온 국가에 외래적인 요소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다. 발해에는 고구려 문화, 당나라 문화, 말갈 문화, 기타 외래 문화와 함께 발해인들이 창조한 고유한 문화가 있을 것이다.33)예컨대 앞서 제시한 벽화 세부 양식과 함께 柱礎裝飾瓦, 鬼面瓦 양식, 多人葬 풍습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고유 요소를 무시해서는 역사의 진실이 가려질 수밖에 없다.

각국이 왜 편향된 시각을 지니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으로 정치적 요인 이외에 자료의 결핍을 들 수 있다. 북한학자들은 함경도에서 발굴된 자료만 접하다보니 자연히 고구려 문화가 중심을 이룰 수밖에 없고, 러시아 학자들은 연해주에서 조사된 자료에만 열중하다보니 그 또한 말갈 문화가 중심에 서지 않을 수 없으며, 중국학자들은 上京城 같은 상층부 문화를 접하다보니 당나라 문화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발굴 자료는 簡報 정도로 간단히 보고되고 있고 그나마 발굴 성과의 극히 일부분만 공표가 되니 상대국의 연구 자료를 제대로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외국인에게는 발굴 현장 접근이 차단되어 있고, 유적 답사의 기회마저도 갈수록 박탈되고 있어 공동 연구의 장을 마련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牡丹江 하류에 蓮花댐을 건설하면서 수몰 예정 지역에 대해 긴급 발굴을 실시하였다. 이제 이 지역의 발해 유적이 수몰됨에 따라 더 이상 현장을 답사할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경제개발이 지속되면 이렇게 사라질 유적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1960년대에 桓仁에 댐이 생겨 고구려 초기 유적들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고구려 건국의 역사가 미궁에 빠져 있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신들이 가진 자료만 연구의 기초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한 학자들은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진하나마 3개국 발굴 자료를 모두 종합할 수 있고 다양한 시각을 함께 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국내의 발해사 연구자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유적 현장을 제대로 접근할 수 있고 나아가 가능하다면 일본학자들처럼 공동 발굴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학술문화교류협정을 맺어주어야 할 것이며, 연구자들의 해외 답사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 프로그램도 개발해주어야 할 것이다.

주요 단어 : 발해, 문화사, 문학, 말갈, 불교, 유학

Current Studies on the Balhae Culture

Song, Kiho

  As of December 2002, total of 713 articles and books are reported to be treating the subject of Balhae culture. Among those works, 362 pieces were authored by the Chinese scholars, 63 were by the North Koreans, 71 were by the South Koreans, 112 by the Russians and 105 by the Japanese. Works concentrating on this particular subject occupy 28.8% of all of the existing 2,477 pieces of work dedicated to the Balhae history. Archaeological research is the most prominent area among them. But studies that highlight other vital areas such as literature, education, Buddhist and Confucian philosophies, games, music, clothes and customs are very few to say the least. The overall cultural studies of the Balhae dynasty is still in its infant stage, and a lot of work has to be done.

Currently we do not have any hugely controversial issues regarding the Balhae culture at this point, yet the glaring exception might be the matter of properly understanding the nature of the Balhae dynasty's culture itself. It seems that each of every researchers is expressing considerably nationality-based opinions, instead of opinions based on the researcher's individual expertise and independent researches. In their researches Chinese scholars mainly focus on the Malgal(Mohe in Chinese) qualities of the Balhae culture and also elements of the Chinese Tang dynasty which would have had considerable influence upon the Balhae culture. Yet Korean scholars(either South or North) and the Japanese scholars are more drawn to the Goguryeo factor. Then the Russian scholars demonstrate a rather unique viewpoint basically concentrating their attention on the Malgal elements, while also considering other various factors such as the Siberian or Central Asian influences.

These differences are mainly due to the general lack of material exchanges among researchers of various countries. In order to bridge the gaps and bring ourselves closer to the rightful understanding of the Balhae history, active efforts of information exchange would have to be made among fellow scholars, and the government also should not hesitate to support those efforts.

 Key words : Balhae culture, Malgal(Mohe), Goguryeo, literature, Buddhist, Confucian philosophies

编辑:李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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