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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首领的性质


宋基豪
2007-04-12 16:30:16 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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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 머리말

지금까지 발해의 社會 構成을 다룬 논문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많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그만큼 열기를 띠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발해의 住民 構成에 초점을 맞추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종족 구성, 靺鞨系 주민과 高句麗系 주민의 비율, 이들의 종족적 융합 여부 등을 다루는 데 한정됨으로써 그밖의 다른 주제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는 발해사를 고구려의 연장선상에서만 바라보거나, 당나라 역사나 일본 역사로부터 관조하는 제3자적 연구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에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

발해사는 그 자체를 복원하기 위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한 연구로서 주목되는 것이 首領에 관한 일련의 연구들이다. 首領은 발해의 지방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계층이다. 따라서 그 정체를 밝혀 내는 것은 발해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전제조건이 된다.

발해의 수령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편의 글들이 발표되었다. 오래 전에 金毓黻, 瀧川政次郞 등이 발해의 首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지만,1)이들은 별다른 논증 없이 간단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1960년대 초에 박시형이 이를 본격적으로 논증하고자 시도하였고,2)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전적으로 수령 문제만을 다룬 논문이 한국과 일본에서 거의 동시에 발표되었으니,3)이로부터 수령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4)특히 鈴木靖民의 글들은 이 방면에서 가장 심화된 연구를 진행한 것이어서, 추후 일본에서의 연구에 선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밖에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 이를 간단히 언급한 글들도 그 사이에 적지 않게 발표되었다.5)

이렇게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지만, 기왕의 견해에서 수정이나 보충할 곳이 일부 눈에 뜨인다. 특히 類聚國史의 해석에만 너무 집중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수령에 관한 다른 사료들이 여기에 종속되어 버리고 마는 결과를 빚어 왔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수령이란 용어가 원래 중국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그리고 발해에서 이를 받아들이면서 어떠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이상의 고찰을 기초로 하여 그간에 집중적으로 검토해 온 類聚國史의 수령에 관한 사료를 다시 해석해 보고, 아울러 발해에서 수령이란 용어가 어떠한 배경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가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수령의 성격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봄으로써, 그간의 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II. 首領의 개념

우선, 발해의 首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사용된 용어 자체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首領이란 용어6)가 사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외국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법제적인 용어, 또는 공식적인 용어로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唐나라 때로 보인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료를 검토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25史의 東夷傳들을 살펴보면, 수령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舊唐書, 新唐書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渠帥, 酋長, 酋帥를 비롯하여 酋豪, 酋渠, 豪帥, 渠長, 長帥, 主帥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다가, 당나라 역사서부터 비로소 首領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三國史記나 국내의 고대 金石文을 보더라도 당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百濟와 高句麗의 멸망기에만 등장하고, 그것도 중국인들이 작성한 글에만 한정되어 있다.7)다만 崔致遠의 孤雲集에 신라인이 사용한 수령의 예가 있는데, 그 배경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그리고 冊府元龜 外臣部에서 朝貢 및 褒異 부분을 선택하여 검토해 본 결과, 역시 당나라 때부터 수령이란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8)

비록 문헌을 샅샅이 검토해 보지는 못하였지만, 이상의 고찰만으로도 당나라 때에 와서 비로소 수령이란 용어가 보편화된 것으로 추정하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수령이란 용어가 문헌에 등장하고는 있지만, 이 때에 와서 歷史書나 金石文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정확한 배경에 대해서 지금으로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물음에 시사를 던져 주는 문구가 唐六典에 있어서 주목된다.

典客令掌二王後介公·酅公之版籍, 及東夷·西戎·南蠻·北狄歸化在蕃者之名數, 丞爲之貳. 凡朝貢·宴享·送迎預焉, 皆辨其等位而供其職事. 凡酋渠首領朝見者, 則館而以禮供之. [三品已上準第三等, 四品·五品準第四等, 六品已下準第五等. 其無官品者, 大酋渠首領準第四等, 小酋渠首領準第五等.] 若疾病, ···. 其喪事所須, 所司量給, 欲還蕃者, 則給轝遞至境. [首領第四等已下不奏聞, 但差車·牛送至墓所.] (��唐六典�� 18, 鴻臚寺 典客署 ; []안은 原注)

이 문구는 외국 손님의 접대 실무를 담당하는 典客署의 규정이다. 여기에는 외국에서 온 酋渠首領을 官品의 有無와 高低에 따라 어떻게 대우할지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官品은 本國의 관품이 아니라 당나라로부터 받은 것을 가리킬 것이다. 당나라로부터 받은 관품이 3품 이상인 자는 第3等爵에 준하고, 4품과 5품인 자는 제4등작에 준하고, 6품 이하는 제5등작에 준하며, 관품이 없는 자로서 大酋渠首領인 자는 제4등작에 준하고, 小酋渠首領인 자는 제5등작에 준한다고 한다.9)

여기서는 외국에서 사신으로 온 우두머리들을 酋渠首領이라 통칭하고 있다. 이는 酋渠와 首領을 합성한 말로서, 동일한 의미의 반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酋渠와 그보다 낮은 등급의 首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25史의 용어들을 참고해 보면 대체로 추거와 수령은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또한 뒤에 인용하듯이 冊府元龜에서 왕도 大首領이라 부르고 있어서 수령은 추거보다 결코 낮은 등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통해서도 두 용어가 동일한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酋渠와 首領이란 동일한 의미의 반복이라 할 수 있으니, 이를 줄여서 酋渠 또는 首領으로만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령이란 용어가 당나라에서부터 보편화된 것은 이러한 규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수령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酋長과 같은 용어들도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당나라에 들어와서는 首領이란 용어가 중심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위의 규정으로 돌아가 보자. 우선 자신들이 수여한 관품의 유무에 따라 수령들을 나누었다. 그 다음에 관품이 있는 자는 高低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하고, 관품이 없는 자는 세력의 크기에 따라 大小를 구분하였다. 여기서 酋渠首領 또는 首領은 외국에서 사신으로 온 우두머리 전체를 지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품이 있는 자를 제외한 좀더 좁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관품이 있는 자들은 보통 그들의 이름 앞에 관품이나 관직을 명시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굳이 酋渠首領이나 首領이란 말을 따로 붙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용어는 흔히 관품이 없는 자들의 이름 앞에 자주 붙여졌을 것이므로, 관품의 유무도 중요한 구별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측의 발해 사료에 보이는 首領은 이러한 규정을 토대로 하여 당나라 입장에서 쓰인 것들이다. 우선 冊府元龜의 경우를 보자.

1-①(開元十八年;730)二月, ··· 渤海靺鞨大首領遣使知蒙來朝, 且獻方物·馬三十匹. (冊府元龜 971, 外臣部, 朝貢 4)

1-②(開元四年;716)閏十二月, 東蕃‧遠蕃靺鞨部落‧佛涅部落‧勃律國皆遣大首領來朝.10)  (冊府元龜�971, 外臣部, 朝貢 4 ; 974, 外臣部, 褒異 1)

1-③(開元九年;721)十一月己酉, 渤海郡靺鞨大首領‧鐵利大首領‧拂涅大首領‧契丹蕃郎將俱來朝, 竝拜折衝, 放還蕃.11) (冊府元龜�971, 外臣部, 朝貢 4 ; 974, 外臣部, 褒異 1)

1-④(開元十三年;725)正月, 契丹遣使·渤海遣大首領烏借芝蒙‧黑水靺鞨遣其將五郞子·大食遣其將蘇黎等十三人, 竝來賀正旦, 獻方物. (같은 책, 971, 外臣部, 朝貢 4)

1-⑤(開元)二十五年(737)正月, ··· 渤海靺鞨大首領木智蒙來朝. (같은 책, 971, 外臣部, 朝貢 4)

1-⑥(開元十三年;725)四月甲子, 渤海首領謁德‧黑水靺鞨諾箇蒙來朝, 竝授果毅, 放還蕃. (같은 책, 975, 外臣部, 褒異 2)

1-⑦(開元十五年;727)四月丁未, 勅曰, 渤海宿衛王子大昌勃價及首領等久留宿衛, 宜放還蕃. 庚申, 封大昌勃價襄平縣開國男, 賜帛五十疋, 首領以下各有差. (같은 책, 975, 外臣部, 褒異 2)

1-⑧(開元二十四年;736)十一月癸酉, 靺鞨首領聿棄計來朝, 授折衝, 賜帛五百疋, 放還蕃. (같은 책, 975, 外臣部, 褒異 2)

1-⑨(開元二十五年;737)八月戊申, 渤海靺鞨大首領多蒙固來朝, 授左武衛將軍, 賜紫袍·金帶及帛一百疋, 放還蕃. (같은 책, 975, 外臣部, 褒異 2)

1-⑩(乾化)二年(912)閏五月戊申, 詔以分物銀器賜渤海進貢首領以下, 遣還其國. (같은 책, 976, 外臣部, 褒異 3)

이상의 사료를 보면 발해 수령에 관한 기록이 開元 연간에 집중되어 있어서 마치 이 시기에만 특별히 사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廻紇이나 契丹, 奚의 수령에 대해서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나오므로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다.

①에서는 발해 왕인 武王을 大首領이라 부르고 있고, ②이하에서는 왕을 제외한 신하들을 大首領 또는 首領이라 부르고 있다. 당나라는 무왕이 즉위한 직후인 719년 6월에 吳思謙을 보내서 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였으므로,12)①의 경우는 중국의 관품을 받은 首領에 속한다. 반면에 ②이하의 大首領, 首領들은 따로 중국의 관품을 수여 받지 않았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두 종류의 사료를 보면, 大首領과 (小)首領으로 분류하는 대상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외국에서 사신으로 온 우두머리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大小를 나누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官品을 받지 않은 우두머리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대소를 나누는 경우이다. 冊府元龜에서는 왕까지 대수령이라 하였으므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전자의 예에 속하고, 반면에 ��唐六典��에서 관품이 없는 자를 대상으로 대수령과 소수령을 구분한 것은 후자의 예에 속한다. 따라서 똑같은 대수령, 소수령이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을 대수령이라 하면서 그 아래에서 지배를 받던 일부 인물도 대수령으로 동일하게 부른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冊府元龜��의 기록은 당나라의 입장에서 변방의 지배자들을 왕이건 그 아래 지배자이건 간에 모두 동일시하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에 조공한 각국의 수령들이 받은 官爵이나 官職의 品階가 최상층인 王부터 최말단인 執戟까지 다양한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13)

이밖에 발해 멸망 후의 遺民으로서 首領 大舍利 高模翰, 首領 崔烏斯(崔烏斯多)와 같은 인물들이 보이는데,14)이들도 역시 ��책부원귀��와 동일한 시각에서 쓰인 것이다.

한편으로 당나라에서 발해에 보낸 勅書에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 수령의 용례가 보인다. 칙서는 모두 5편이 전해지는데, 주지하다시피 각 칙서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問安 文句가 달려 있다.15)

2-①秋冷, 卿及衙官首領百姓竝平安好. (勅渤海王大武藝書 第1首)

2-②春晩, 卿及衙官百姓竝平安好. (同 第2首)

2-③(冬初)漸冷, 卿及衙官百姓已下竝平安好. (同 第3首)

2-④夏初漸熱, 卿及首領百姓等竝平安好. (同 第4首)

2-⑤今因王子大昌輝等廻國, 賜卿官告及信物, 至宜領之. 妃及副王長史平章事等, 各有賜物, 具如別錄. (與渤海王大彛震書)

이를 보면, 발해 사회가 ①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王(卿) - 衙官 - 首領 - 百姓으로 구성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서 ②, ③, ④에서는 首領이나 衙官이 누락되어 있고, 시기가 다른 ⑤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衙官은 원래 당나라에서 軍府에 속하였던 하급 관리였지만,16)여기서는 이에 구애되지 않고 관리 일반을 통칭하고 있다.

발해에 보내는 칙서에서는 ①과 같은 것이 전형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나라에 보낸 칙서에서도 일부 계층이 누락된 채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17)②, ③, ④는 이러한 예에 속한다. 따라서 수령이나 아관의 어느 하나가 누락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누락된 예가 있는 이유를 들어서 양자를 동일한 성격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으나,18)이렇게 되면 아관과 수령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를 설명하기가 어려우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구나 突騎施에 보낸 칙서에서는 아관과 수령 사이에 纛官이 끼어 있으므로 동의어의 반복으로 볼 수 없다.

그러면, 위의 사료에 보이는 수령의 성격을 검토하기 전에 우선 당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보낸 여러 칙서들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이를 보면 突厥, 吐蕃, 南詔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대해서 수령을 운위하고 있다. 그런데 新羅에서는 수령이란 계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이를 언급하고 있으므로,19)칙서의 수령은 상대국에 실재로 존재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당나라에서 스스로 사용한 용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칙서를 받는 상대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冊府元龜에서처럼 당나라 내부에서는 蕃國의 왕들도 大首領이라 칭하였으면서도, 해당국에 보내는 勅書에서는 왕을 수령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또한 ��唐六典��의 규정에서는 자신들이 수여한 관품의 유무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衙官은 해당국의 관품을 가진 관리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수령은 당나라 관품이 아니라 해당국의 관품을 가지지 않은 자로 변형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도 상대국을 의식한 결과로 생각된다.

아울러 問安의 대상자 명칭들이 모든 국가에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마다 다르며, 首領이란 용어만 하더라도 모든 국가에 다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문안 문구가 아예 없는 칙서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때마다 상대국의 실정도 고려되었음을 보여준다. 때때로 상대국의 계층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예도 있으니, 신라에 보낸 칙서에 首領이나 吏人 대신에 官吏, 僧道, 將士가 나열되어 있고, 回鶻에 보낸 칙서에 部下諸官과 함께 右相 阿彼元 등, 部落 黑車子·達怛 등이 나열되어 있다. 이들도 역시 상대국의 실제 정황을 고려하였음을 반영한다.

결국 칙서에 보이는 수령은 당나라에서 사용된 용어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상대가 되는 나라의 입장도 고려하여 쓰여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나라와 상대국의 사정이 절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이에 따라 首領의 용례도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다. 南詔나 新羅에서는 분명히 관리를 가리키고 있지만, 渤海와 突騎施에서는 衙官과 함께 사용되어 관리 아래의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칙서에 사용된 수령을 모두 동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뒤에 서술하다시피 발해에는 국내에서 부르던 수령들이 존재하였으므로, 발해에 보낸 칙서에서는 이러한 계층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①의 사료에 아관 다음으로 수령이 등장하는 것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칙서들에서도 양자가 동시에 나올 때에는 수령이 항상 아래에 놓이는 것으로 보아서, 수령은 아관보다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國書에도 이와 비슷한 문구들이 있다.

 3-①夏熱, 王及首領百姓竝平安好. (日本逸史�5, 延曆 15 5)

3-②夏中已熱, 惟王淸好. 官吏百姓竝存問之. (類聚國史�193, 延曆 17 5)

3-③春首餘寒, 王及首領百姓竝平安好. (日本後紀�24, 弘仁 6년 정월)

3-④仲夏炎熱, 王及首領百姓竝平安好. (類聚國史�193, 弘仁 7 5)

3-⑤熱劇, 王及所部平安好. (日本三代實錄�3, 貞觀 원년 6)

3-⑥梅熟, 王及境局, 小大無恙. (같은 책 권21, 貞觀 14 5 ; 菅家文草�8)

 문안 문구에 王만이 나오거나 대상이 막연한 경우를 제외하고, 구체적인 명칭이 나오는 것들만 나열해 본 것이다. 衙官이 官吏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①에서 ④까지는 당나라 칙서와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국서는 당나라 칙서를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여기에 쓰인 首領도 역시 앞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III. 발해의 首領

지금까지 당나라에서 사용된 首領을 중심으로 그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발해도 首領이란 용어를 나름대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당나라에서 사용하던 수령이란 용어를 받아들인 것임에 틀림없다. 발해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신라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인이 직접 사용한 예는 崔致遠의 글에 유일하게 보인다.

4-①新羅國當國, 差遣宿衛學生首領, 入朝請附國子監習業. 謹具人數姓名, 分析申秦如後, 學生八人[崔愼之等], 大首領八人[析婥等], 小首領二人[蘇恩等]. ··· 臣今差前件學生等, 以首領充傔. (孤雲集�1,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

4-②令准去文德元年放歸, 限滿學生大學博士金紹游等例, 勒金茂先等, 幷首領輩, 隨賀正使給餐金潁船次還蕃. (같은 책, 奏請宿衛學生還蕃狀.)

이것은 모두 신라 왕을 대신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글이고, 여기에 나오는 수령들은 宿衛 學生에 딸린 수행원으로 파견된 인물들이다. 앞에서 인용한 1-⑦에는 발해의 宿衛 王子였던 大昌勃價에 首領 등이 딸려 있다. 따라서 宿衛를 위해서 당나라에 파견된 학생이나 왕자에게 수령이 딸리는 것이 일반적인 듯이 보인다. 그런데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신라에서 수령이란 용어를 독자적으로 사용된 증거가 다른 곳에 보이지 않고, 유독 최치원의 글에만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의 글을 좀더 살펴보면 알 수 있다.

崔致遠의 글을 훑어보면, 스스로 蕃國이라 하면서 事大로서 당나라를 대하고 있는 사실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문장 가운데 諸蕃, 酋長, 臣蕃, 蕃臣과 같은 용어들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신라 왕이 臣으로서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新羅의 일부 비문에서 신라 왕의 명령에 대해서 敎와 함께 詔란 용어를 섞어 쓴 예가 보이지만,20)그가 지은 金石文에서는 어디까지나 敎만을 쓰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살이 하였던 경험이 있는 그의 개인적인 성향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듯하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그가 사용한 수령이란 용어는 신라에서 사용되었던 실제적인 용어라기보다는 당나라 시각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라에 수령이란 실제 계층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당나라에서 사용되던 외교적인 용어를 차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 보이는 수령을 실제로 수령 계층이 존재하였던 발해의 경우와 직접 비교하기는21)어려울 것이다. 析婥을 위시한 大首領 8인과 蘇恩을 위시한 小首領 2인은 지방의 村主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아마 官人을 등급의 고저에 따라 구분하여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 수령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에 보내진 사신단의 구성에서도 간접적으로 뒷받침된다. ��延喜式��의 賜蕃客例를 보면 발해 왕과 사신 일행에는 물품 수여 대상에 수령이 들어 있지만(6-③), 신라의 경우에는 수령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22) 

한편, 신라와는 달리 발해에서는 스스로 首領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에 보낸 사신단의 구성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사신단의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咸和 11년 渤海 中臺省牒 寫本’이다.23)이는 발해에서 보낸 중대성의 첩을 베껴 쓴 것이기 때문에, 수령이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직접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①은 첩 가운데 사신단의 구성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 것이고, ②는 이와 관련된 문헌 사료이다.

5-①渤海國中臺省     牒上  日本國太政官

   應差入覲  貴國使政堂省左允賀福延幷行從壹伯伍[人]

  一人使頭    政堂省左允賀福延

  一人嗣使    王寶璋

  二人判官    高文暄  烏孝順

  三人錄事    高文宣  高平信  安寬喜

  二人譯語    季憲壽  高應順

  二人史生    王祿昇  李朝淸

  一人天文生  晉昇堂

  六十五人大首領

  卄八人梢工

5-②(承和九年;842)夏四月 ··· 己巳, 天皇御豊樂殿, 饗渤海使等, 詔授大使賀福延正三位, 副使王寶璋正四位下, 判官高文喧‧烏孝愼二人竝正五位下, 錄事高文宣‧高平信‧安歡喜三人竝從五位下. 自外譯語已下, 首領已上十三人, 隨色加階焉. (��續日本後紀�� 11, 仁明天皇)

①은 발해 사신단이 使頭(大使) - 嗣使(副使) - 判官 - 錄事 - 譯語 - 史生 - 天文生 - 大首領 - 梢工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일본에 보낸 공식문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에 기재된 순서는 분명히 위계를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②에서처럼 이들 사신이 일본에서 실제로 예우를 받을 때에도 이 순위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순서는 발해 사신에 대한 일반적인 예우 규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6-①大使·副使, 日各二束五把. 判官·錄事, 日各二束. 史生·譯語·醫師·天文生, 日各一束五把. 首領已下, 日各一束三把(類聚三代格�18, 夷俘幷外蕃人事, 天長 5년 정월 2, 太政官符 應充客徒供給事)

6-②凡渤海客食法, 大使·副使日稻各五束, 判官·錄事各四束, 史生·譯語·天文生各三束五把, 首領·梢工各二束五把. (延喜式� 26, 主稅 上)

6-③渤海王.<絹卅疋, 絁卅疋, 絲二百絇, 綿三百屯, 竝以白布褁束.> 大使.<絹十疋, 絁卄疋, 絲五十絇, 綿一百屯.> 副使.<絁卄疋, 絲卌絇, 綿七十屯.> 判官.<各絁十五疋, 絲卄絇, 綿五十屯.> 錄事.<各絁十疋, 綿卅屯.> 譯語·史生及首領.<各絁五疋, 綿卄屯.> (같은 책, 30, 大藏省, 賜蕃客例)

①은 天長 5년(828)의 규정으로서 앞에 인용한 中臺省 牒의 작성 연대인 841년과 몇 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수령이 대사, 부사, 판관, 녹사, 사생, 역어, 의사, 천문생 다음에 놓인다. ②에서는 초공과 함께 대사, 부사, 판관, 녹사, 사생, 역어, 천문생, 수령, 초공 다음에 놓였고, ③에는 역어, 사생과 함께 왕, 대사, 부사, 판관, 녹사, 역어, 사생 다음에 놓였다.따라서 수령은 梢工(뱃사공)이나 역어·사생과 동일하게 취급되기도 하면서, 그밖의 다른 어느 직책보다도 낮은 지위에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5-①로 돌아가 보면, 수령은 전체 인원인 105명 가운데 60%가 넘는 65명이나 되어 과반수를 차지하여서, 심지어는 뱃사공보다도 많다. 그리고 이들은 수령 가운데에서도 상급 수령인 大首領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수적으로 우세였고 수령 가운데에서도 상급에 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뱃사공 바로 위에 순서가 놓일 정도로 이들은 낮은 지위에 처해 있었다. 이에 대한 의문은 다음 사료를 다시 검토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7-①(天平)十二年(740)春正月 ··· 丙辰, 遣使就客館, 贈渤海大使‧忠武將軍胥要德從二位, 首領‧无位己閼棄蒙從五位下, 竝賻調布一百十五端, 庸布六十段. (續日本紀 13, 聖武天皇)

7-②(嘉祥二年;849)五月, ‧‧‧ 丙辰, 天皇於豊樂殿, 宴客徒等, ··· 訖授大使王文矩從二位, 副使烏孝愼從四位上, 大判官馬福山‧少判官高應順竝正五位下, 大錄事高文信‧中錄事多安壽‧少錄事李英眞, 竝從五位下, 自餘品官幷首領等, 授位有階. (같은 책, 19, 仁明天皇)

7-③(貞觀十四年;872)五月 ··· 十九日戊子, ··· 訖授大使楊成規從三位, 副使李興晨從四位下, 判官李周慶‧賀王眞竝正五位下, 錄事高福成‧高觀‧李孝信竝從五位上, 品官以下幷首領等授位各有等給, 及天文生以上, 隨位階各賜朝服. (日本三代實錄�21, 淸和天皇)24)

①의 사료에서 己閼棄蒙은 발해의 수령이면서 官位가 없었다. 일본에서 받은 관위가 아니라 발해의 관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수령이 관위가 없는 것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었던 사실이 ②와 ③의 사료에서 확인된다. ②에서는 대사, 부사, 판관, 녹사가 나열된 뒤에 自餘品官과 首領이 언급되고 있다. 이른바 ‘그밖의 품관’에는 사생, 역어, 의사, 천문생 등이 해당될 것인데, 이 문구를 보면 수령은 品官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③에서도 ‘품관 이하’와 수령이 倂置되어 있으므로 수령은 품관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천문생 이상만 位階에 따라 朝服을 주었으므로, 천문생 아래에 있던 수령과 초공은 위계가 없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신단 가운데 천문생과 수령 사이에는 현격한 격차가 있었다. 大使에서 天文生까지는 발해의 관품과 관직을 가지고 있었고, 수령은 그러한 것이 없었다. 조정에서 본다면 수령은 관직체제 밖에 존재하였으므로, 가장 낮은 관료보다도 더 하위에 위치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신단의 일원이 되어 있고, 5-②에서처럼 일부 수령에게는 일본에서 위계를 내렸으니,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실제 세력이 상당하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볼 때, 발해의 수령은 당나라 용어를 차용한 것이지만, 당나라처럼 대외적인 용어가 아니라 내부적인 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그것도 官品이나 官職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계층을 지칭하였다. 앞 절에서 서술한 바 있지만, 당나라에서 사용된 수령이란 용어 가운데 협의의 의미를 지닌 ��唐六典��의 無官品者가 발해 수령의 개념에 원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관품을 가지지 않은 자 가운데에서도 현실적인 세력의 대소에 따라 대수령과 (소)수령으로 구분하였던 것도 당나라와 유사하다. 발해 중대성 첩에 나오는 대수령은 바로 이렇게 분류된 존재들이다. 지방의 지배자들 가운데 선발된 자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수령의 대소 구별은 일정한 원칙에 따른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발해에 보낸 당나라 칙서에서 수령을 운위한 것도 대체로 이러한 발해 수령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衙官과 百姓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일반 서민보다는 높으면서도 衙官, 즉 官人은 아닌 이들의 성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IV. 首領과 지방 사회

발해 지방사회의 구성을 잘 나타내는 것이 ��類聚國史��의 기록인데, 여기에도 首領이 보인다.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舘驛, 處處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類聚國史�193, 殊俗部, 渤海 上)

이 문장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로 엇갈려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25)앞 절에서 다룬 수령의 성격과 연계시켜 다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 문장에 사용된 百姓의 개념 검토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百姓이란 용어가 두 번 나온다. 백성이란 말은 원래 平民의 對稱으로서 姓氏를 가지고 있던 百官을 가리키던 것이 戰國時代 이후에 平民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26)이 문장에 나오는 백성은 기본적으로 전자보다는 후자를 가리킨다.27)발해에 보낸 당나라 칙서에서 首領 다음에 언급된 百姓은 이를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백성이란 의미가 이 문장의 앞과 뒤에서 각각 약간 다르다. 앞에 사용된 百姓은 村長이 되는 土人과 靺鞨을 모두 포괄하므로, 渤海國人 전체를 가리키는 확대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뒤에 나오는 백성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村長이나 首領이 포함되지 않으므로 일반 평민에 더 중점이 두어진 개념이다.

결국 위의 문장은 “渤海國人에는 靺鞨人이 많고 土人(고구려인)이 적은데,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된다. 大村의 촌장은 都督이라 하고, 그 다음 촌의 촌장은 刺史라 한다. 그 아래는 일반 평민들이 모두 首領이라 부른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발해의 지방 사회에는 중앙에서 임명한 都督과 刺史가 있었고, 그 아래에 首領과 百姓이 존재하였다. 위의 기록은 발해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縣令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현이 설치되는 후대에도 地方官으로서 都督, 刺史, 縣令이 있었고, 그 아래에 따로 首領과 百姓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백성과 지방관 사이에 존재하는 首領은 앞 절에서 도출해 낸 수령의 성격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수령이란 중앙에서 임명된 地方官과 일반 평민인 百姓 사이에 끼여 있었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官人이 아니어서 官品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백성 바로 위에 군림하는 支配者였다. 관료에 편입되지 않은 독자적인 지배자들이었던 것이다. 발해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자연부락 집단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발해 중앙세력의 지방에 대한 침투력에서 한계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성 바로 위에 있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신라의 村主와 비길 수 있는 존재이지만, 이보다는 훨씬 독자성을 지니면서 일반인들을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村主가 在地 有力者라고 한다면, 首領은 在地 支配者라고 대비시켜 부를 수 있을 듯하다.

그간의 연구를 보면, 발해의 首領에 地方官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수령에 대해서 가장 상세히 고찰한 鈴木靖民은 이를 上級首領과 下級首領으로 나누어 상급수령에 도독, 자사 등의 관인을 포함시켰고,28)이에 앞서 新妻利久도 수령에 도독, 자사를 포함시켰다.29)이밖에 金毓黻은 庶官, 瀧川政次郞은 地方官, 李龍範은 소규모 행정단위의 長, 河上洋은 토착부락장에게 준 官名으로 설명하였다.30)결국 이들은 수령을 官人으로 생각하였거나, 아니면 이러한 관인도 포함된 더 넓은 개념으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혔듯이 발해의 수령은 적어도 官人은 아니었다. 지방관 아래에 있었던 재지 지배자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官等을 지니고 있었던 신라의 촌주와는 다른데, 이것은 그만큼 발해의 수령이 중앙의 권력에 대해서 독립성을 띠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특히 鈴木靖民은 발해의 지방사회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首領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회체제를 首領制로 부르자고 제안하였다.31)발해 지방관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임명되었는지 현재로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는 중앙에서 임명되어 파견되었겠지만, 현지의 수령들을 관리로 선택하여 주변 세력을 통치하도록 한 경우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발해는 그만큼 지방 세력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중앙 정부에서 통치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견해에는 공감이 가는 점이 많다.

그러나 수령 출신이 지방관이 된 경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수령의 범위를 지방관에까지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적어도 발해에서 사용된 수령의 용례 속에는 지방관이 포함되지 않았다. 7-①의 사료에서 보듯이 739년에 파견된 2차 遣日使에서 大使 胥要德은 若忽州都督이었고, 그 아래에 따로 首領이 있어서 양자는 엄격히 다른 신분이었다.

발해의 지방사회에는 광범위하게 수령이라 불리는 지배자들이 있었고, 중앙에서 임명된 지방관은 이들을 매개로 하여 百姓들을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수령은 전통적인 部落長 출신들로서 상당한 독자성을 향유하고 있었고, 중앙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수령 가운데는 과거 고구려 지역의 경우 고구려 계통의 인물들도 들어 있었으니, 高齊德이나 高多佛이 그러한 인물들이다.32)그렇지만 수적으로는 말갈 부족의 지배자 출신들이 많았을 것이다.33)발해에서는 이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인정하여 독자적인 대외교역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 보낸 사신단에 수령이 포함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발해에서 首領이란 용어를 차용하여 쓴 것도 지방사회에 엄존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고려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당나라에서 보면 首領은 蕃長의 의미로 쓰인 것이고, 이것은 藩國이든가 아니면 그만큼 독자성을 지닌 지배자의 상정을 전제로 하여야만 한다. 여기에는 ��高麗史��에서 사용된 首領이란 용례가 참고가 된다. 世家를 살펴보면 顯宗 13년 8월에 鐵利國 首領 那沙가 사신으로 온 것에서 시작하여 文宗 19년 3월에 東女眞 首領 霜昆 등 22인이 온 것을 마지막으로, 그 사이에 女眞, 東女眞(東蕃), 靺鞨, 東北女眞 및 耽羅國의 首領들이 고려에 조공해 왔다고 한다.34)이러한 수령들도 당나라의 용례를 따른 것으로서, 고려가 일정 기간 주변 지역에 藩國들을 상정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를 생각해 본다면, 발해가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배자들에게 首領이란 칭호를 붙인 것은 이들이 비록 국외가 아니라 국내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蕃長처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798년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茹富仇가 虞婁部의 蕃長 겸 都督이었던 사실은 우루부가 이미 발해 영역으로 들어와 定理府와 安邊府가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蕃國처럼 상정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에 鐵利人이나 기타 靺鞨人을 대동하였던 것도 이들을 마치 蕃國이나 蕃長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5)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에 수령이 포함된 것도 이들을 대동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발해가 때로는 皇帝國을 자임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세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V. 맺음말

지금까지 발해 수령의 성격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발해에서 사용된 首領이란 용어는 원래 당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蕃國의 우두머리를 지칭해 왔는데, 당나라 때에 들어와서 首領이란 말이 중심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 수령이란 말은 우두머리들을 상하 구별 없이 모두 일괄적으로 가리키고 있지만, 때로는 당나라 官品을 수여받지 못한 우두머리에 한정해서 좁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으니, 발해에서 사용된 수령은 후자에 더 가까운 개념을 지니고 있다.

발해에서 수령이란 용어를 차용하면서, 국외의 지배자가 아니라 국내에 상존하고 있는 독립적인 지배자들을 지칭하였다. 발해가 커다란 영토를 개척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토착의 지배자들이 독립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중앙에서 각지에 地方官을 파견하기는 하였지만, 이들 관리는 어디까지나 수령이라 불리던 지배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수령이 일반 백성을 직접 장악하고 있었고, 지방관들은 이들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따라서 발해의 지방사회는 都督, 刺史, 縣令의 地方官 - 大小의 首領 - 百姓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발해 수령은 중앙 정부로부터 官職이나 官品을 받지 않은 세력이었다. 그만큼 이들은 독자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在地 支配者들로서, 발해의 官職體制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 가운데 최말단 관리보다도 더 아래에 위치하고 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신단에 동참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는 중앙에서 이들의 세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막대하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발해의 지방 통치는 말단 지배자들인 수령의 세력을 완전히 해체하지 못한 데에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여 蕃長으로 여기면서 스스로 皇帝國을 자임하는 면도 지니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编辑:李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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