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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的地方统治及其实像


宋基豪
2007-04-23 17:09:30 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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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의 地方 統治와 그 실상*

I. 머 리 말 

발해는 전성기에 사방 5천 리에 이를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넓어진 영토를 어떠한 제도로써,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통치하였는가를 해명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발해의 지방 통치 문제는 그 동안 크게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것이 地理 考證이다. 이 방면의 연구에 길이 열리게 된 것은 19세기 초에 丁若鏞, 韓致奫, 韓鎭書와 같은 조선시대 實學者들이 渤海 地理를 실증적으로 고찰하면서부터였다.1)그리고 19세기 말부터 금세기 전반까지에는 중국의 曹廷杰, 金毓黻이나 일본의 松井等, 津田左右吉, 和田淸 등이 이 방면에 연구를 시작함으로써 자못 성황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도 孫進己, 鄭英德, 陳顯昌, 魏國忠 등의 중국학자들이 새로 발견된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기도 하면서 연구에 동참하였지만, 앞의 시기와 크게 달라진 내용은 별로 없다.

이렇게 많은 연구자들이 지리 고증에 매달렸던 것은 가장 기본적인 발해의 행정 구역마저 소재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정 구획의 가장 큰 단위인 府를 예로 들더라도, 발해의 중심 구역이었던 龍泉府, 顯德府, 南海府, 長嶺府 등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변두리에 있던 懷遠府, 安遠府, 安邊府 등의 위치 비정에는 의견의 편차가 아주 큰 실정이다. 그러하니 그 아래의 州, 縣의 소재지는 말할 것도 없다. 

지리 고증 다음으로 많이 다루어진 것이 지방의 세력가들로 추정되는 발해 首領의 실체에 대한 해명이다. 수령의 성격에 대해서는 일찍이 金毓黻, 朴時亨 등이 다룬 적이 있지만, 논의를 본격화시킨 것은 주로 일본인 연구자들이다. 鈴木靖民이 日本古代史에서 논의되어 왔던 在地首長制論의 연장선에서 《類聚國史》의 渤海 首領에 관한 기록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것이 최초의 시도였고,2)河上洋, 李成市, 大隅晃弘 등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 결과 발해 수령이 내부적으로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존재였음을 규명하고, 이를 매개로 한 발해의 사회 체제를 首領制로 부르게 되었다.3)국내에서도 鈴木靖民과 거의 같은 시기에 金鍾圓의 논문이 나온 이래로 몇 편의 글이 발표되었다.4)

발해의 지방 통치에 관한 연구는 사실상 이 두 가지 문제에 한정되어 있다. 이밖에는 발해의 住民 構成을 다룬 盧泰敦의 논문 및 고구려 지방제도로부터의 계승성을 밝힌 河上洋의 논문도 발해의 지방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5)

이상의 연구들을 제외하고 나면, 《新唐書》渤海傳이나 《遼史》地理志에 서술된 지방 행정 구획과 대외교통로, 각 지역의 특산물 등을 그대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발해의 지방제도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 글에서는 이상의 연구 성과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지방 통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사실 그간의 연구들이 지방 사회의 구조를 해명하는 靜態的인 측면에 집중됨으로써,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과정을 추구하는 動態的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지리 고증이나 수령제, 주민 구성 문제 등이 모두 앞의 예에 속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시간의 경과를 중요한 변수로 하여, 그에 따른 지방 통치제도의 변천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고찰해보겠다.

다음으로 문헌 자료와 함께 고고학 자료도 일부 활용하면서 중앙 권력의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어느 정도 가늠해봄으로써 지방 통치의 실제 모습을 파악하고자 한다. 발해의 지방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정연한 듯이 보인다. 사실 단순 비교만 해본다면 新羅나 高句麗 制度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이지만,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하였을 것이다.6)그런 의미에서 제도적인 측면과 함께 그것이 실행되었던 실상을 아울러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II. 지방 통치제도의 변천 

발해의 지방 통치제도는 대략 3단계를 거치면서 변모되었다. 첫째 단계는 건국부터 文王 前期인 8세기 중반까지로서, 이 때는 고구려의 지배체제를 계승하던 시기였다. 둘째 단계는 文王 後期인 8세기 후반부터 宣王 시대인 9세기 전반까지로서, 앞 단계의 제도를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府州縣制를 시행하던 시기였다. 《新唐書》渤海傳에 서술된 5경, 15부, 62주는 이 단계의 완성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 단계는 宣王 다음부터 멸망까지로서, 府州縣制를 일부 개편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기이다.

먼저 첫째 단계부터 살펴보겠다. 高王으로부터 武王을 거쳐 文王 前期에 이르는 시기는 영토가 급격히 팽창하던 때였다. 高王 시대의 영토 확장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突厥이 당나라와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견제 세력 없이 발해가 손쉽게 주변 세력을 정복해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武王이 즉위한 뒤로 그의 諡號에서 알 수 있듯이 영토를 크게 넓혀 나감으로써 대체적인 영토의 틀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그는 727년에 일본에 보낸 國書에서 “욕되게 列國 사이에 끼여들고 외람되게 여러 藩國들을 결속시켜, 高句麗의 옛 땅을 회복하고 夫餘의 풍속을 계승하게 되었다”7)고 하였다. 앞의 문구를 음미해보면 이 무렵에 이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한 상태였고, 뒤의 문구로 보아서 특히 高句麗와 扶餘의 땅을 상당히 차지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新唐書》渤海傳에 따르면 고구려 지역에 鴨淥府와 長嶺府, 부여 지역에 扶餘府와 鄚頡府를 설치하였으므로, 武王의 국서에서 지적한 것은 이들 지역이 발해 영역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이 해는 武王 9년에 해당되므로, 아마 高王부터 시작된 이 방면의 정복 활동이 武王 전반기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던 듯하다. 高王 시기에 당나라가 大武藝를 桂婁郡王으로 봉한 사실로 보건대,8)그의 시대에 이미 고구려 영토의 상당 부분이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런데 濊貊의 땅에 두었던 龍原府와 沃沮의 땅에 두었던 南海府도 사실은 고구려 땅이었던 곳이다. 앞에서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였다고 한 것은 고구려 핵심 지역이었던 압록부나 장령부만 아니라, 고구려 시대에는 邊境에 속하였던 용원부와 남해부도 어느 정도는 영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발해는 서남쪽과 서쪽 방면뿐만 아니라 남쪽 방면으로도 진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732년 9월에 무왕이 張文休 군대를 보내서 海路를 통하여 당나라 登州를 공략하였고,9)다른 한편으로 契丹과 제휴하여 陸路로 당나라를 공격하였다.10)이것은 서남쪽으로 압록강을 경유하는 水路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서쪽으로도 契丹 부근까지 진출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발해가 서남쪽과 서쪽으로 진출하였던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靺鞨 지역으로도 이미 진출해 있었다. 그의 시대에 “영토를 크게 넓히자 동북쪽의 오랑캐들이 두려워 하여 신하가 되었다”11)고 하였다. 동북쪽의 오랑캐가 어느 집단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726년의 黑水靺鞨 공격 사건12)은 발해가 이미 흑수말갈과 접경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때는 아직 上京으로 천도하기 이전이었다.13)그렇지만 肅愼의 땅이었던 上京 일대는 이미 이 당시에 발해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흑수말갈을 공격하였던 경로는 牡丹江을 따라 내려가면서 훗날의 上京 지역과 德理鎭을 거쳤을 것이기 때문이다.14)

한편으로 大同江과 元山灣 방면으로도 진출하였다. 735년에 당나라가 신라에 보낸 칙서를 보면, 신라가 발해에 대비하여 浿江에 방어기지를 설치하고자 요청하였고, 당나라가 이를 승인하였다.15)이를 보면 발해가 한반도의 서북쪽으로 이미 진출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당나라가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도록 하였던 것도 양국의 국경이 서로 붙어 있었거나, 아니면 서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6)그리고 동해안에서 신라와 泥河를 경계로 접경하였던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721년 7월에 신라가 何瑟羅道(江陵)의 장정을 동원하여 북쪽 경계에 長城을 쌓은 사실17)은 이미 이 무렵에 발해가 이 방면으로도 진출하였음을 암시해준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하여 무왕 시대에 이미 서남쪽으로 고구려의 땅, 서쪽으로 부여의 땅, 동북쪽으로 말갈의 땅, 남쪽으로 신라 북쪽의 땅을 정복해 나아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武王이란 諡號는 역시 그의 치적에 걸맞는 것이다.

737년에 文王이 즉위하고 나서 그 직후에도 말갈족들에 대한 정복이 계속 이어져, 8세기 중반에는 鐵利部, 拂涅部, 越喜部, 虞婁部 등을 편입시켰다.18)이로 보아서 문왕 전반기에 오늘날의 연해주 일대인 동쪽 방면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으로 고왕으로부터 문왕 전기까지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이 일단락 되었다. 정복 과정은 먼저 고구려 영역에 속하였던 남쪽과 서쪽으로 진출하였고, 그 다음에 동쪽과 동북쪽을 공략해 들어가는 수순을 밟았다. 《新唐書》渤海傳을 참고로 한다면, 대체로 앞에 서술된 肅愼, 濊貊, 高麗, 扶餘 일대가 먼저 정복되었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挹婁(虞婁), 率賓, 拂涅, 鐵利, 越喜 지역이 그 다음에 복속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 무렵에는 미처 전국적인 단위의 행정체제가 마련되지 않았고, 다만 고구려 통치제제를 계승하거나 이를 원용하여 초기의 영역을 지배해 나아갔다.

먼저, 高句麗 지역에 대해서는 과거의 지배구조를 그대로 인정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것은 8세기 전반에 日本에 파견된 사신들의 관직에서 확인된다. 739년에 파견된 胥要德은 若忽州 都督이었고,19) 758년에 파견된 楊承慶은 行木底州 刺史,20) 759년에 파견된 高南申은 玄菟州 刺史였다.21)

木底州, 玄菟州는 고구려 지명이었다. 木底州는 고구려 시기에 木底城이었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木底州로 바꾸었다. 목저주의 구체적인 소재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蘇子河 유역에 있는 遼寧省 新賓縣 木奇鎭 일대로 비정하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22)玄菟州는 원래 玄菟郡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고구려에 편입된 뒤로 玄菟城으로도 불렸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어떠한 이름으로 改稱되었는지 기록이 없지만, 목저주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에 玄菟州라 불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 현도주의 소재지는 瀋陽이나 撫順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23)이처럼 木底州와 玄菟州가 고구려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 분명하지만, 若忽州의 명칭은 다른 곳에서 확인되지 않는다.24)다만 명칭의 유사성을 고려한다면 고구려 지명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25)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高句麗式 地名이 8세기 중반까지도 그대로 사용되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면서 州의 책임자들이 都督과 刺史로 나뉘어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것은 뒤에 언급하고자 하는 고구려 제도와 관련하여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의 고찰과 연관시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 《類聚國史》의 기록이다.

渤海國者, 高麗之故地也. ···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舘驛, 處處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類聚國史》권193, 殊俗部, 渤海 上)

여기서 영토가 四方 2천리이고, 館·驛이 없다고 한 점으로 보아서 발해 초창기의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26)《舊唐書》발해말갈전에 발해 영토를 사방 2천리라고 하였고, 《新唐書》발해전에는 사방 5천리라 하였으니, 영토만 보더라도 ��신당서��보다는 《구당서》에 가까운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더구나 柵城府와 신라 泉井郡 사이에 39개 역이 있다고 한 기록을 감안한다면, 발해에는 늦어도 8세기 중엽에 驛站이 개설되어 있었다. 新羅에서 泉井郡을 井泉郡으로 개칭한 것이 景德王 16년(757)의 일이었기 때문이다.27)그러므로 발해에 舘驛이 없던 시기는 그 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위의 기록은 발해 초창기, 그것도 8세기 초반까지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확실하다.

아울러 “無州縣舘驛”은 “주·현에 관·역이 없다”보다는 “주·현과 관·역이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뒤에 나오는 村里와 앞에 서술된 州縣이 서로 대비가 되는 단어로서, 州縣이 아직 설치되지 않은 채 村落들이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었던 사실을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장에서는 舘驛의 有無가 아니라 州縣의 유무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 8세기 중반에 고구려 방식의 州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州와 縣이 없다고 한 것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이것은 발해가 전국에 걸쳐 독자적으로 마련한 州縣 制度가 아직 시행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임시 변통으로 고구려 제도를 물려받은 사실까지 염두에 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類聚國史》의 기록은 발해 초기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28)

결국 8세기 초반에 발해의 지방 지배는 都督·刺史 - 首領 - 百姓으로 이어지고 있었다.29)사실 과거의 고구려 지역과 말갈 지역은 초창기에 통치 방식이 달랐을 것이므로, 위의 기록은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발해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적인 모델로 제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굳이 따져본다면 과거에 고구려인들만 살았던 지역이나 말갈인들만 살았던 지역이 아니라, 고구려에 편입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았던 말갈 지역에 가장 근접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델이 발해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발해 사회의 전반적 성격도 이와 유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大村과 次村에 都督과 刺史를 둔 것은 고구려 때에 大城에 都督과 같은 성격의 傉薩을 두고, 그 아래 등급의 성에 刺史와 같은 성격의 處閭近支(道使)를 두었다는 기록을 연상시킨다.30)大村은 고구려의 大城에 비길 수 있고, 次村은 大城 아래의 城에 비길 수 있는 것이다.31)고구려의 城들이 크기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듯이, 발해의 村들도 역시 여러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앞에서 제시하였듯이 동일하게 州의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都督, 刺史로 다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비록 이들이 고구려 말기의 玄菟城, 木底城처럼 城으로서 칭해진 것이 아니라 安東都護府로 개편되면서 붙여진 州의 명칭을 띠고는 있지만, 통치 방식은 고구려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 후기의 城, 안동도호부 아래의 州, 발해 초기의 村이 명칭만 다를 뿐이지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胥要德, 楊承慶, 高南申과 같은 인물들은 바로 위의 기록에 보이는 土人的인 존재로 상정할 수 있다. 중앙에서 이들을 관리로 직접 파견하였던 것이 아니라, 현지 지배자들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주면서 중앙 귀족으로 편입시켜 나아갔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과거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없던 순수 말갈 지역에는 여러 등급의 首領들이 상호 독립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곳에 대해서는 각 수령들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몇 개의 수령들을 지역 단위로 묶어서 그 위에 중앙에서 都督, 刺史와 같은 관리를 파견하여 통제하였거나, 아니면 현지의 大首領을 都督, 刺史로 임명하여 통치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都督, 刺史의 출신은 고구려 지역과 말갈 지역이 서로 달랐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두 지역의 통치 방식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단계에 들어와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이 일단락되면서 전국적으로 一元的 支配體制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단계에 접어들어서도 약간의 영토 변동이 엿보인다. 특히 內紛期에 들어서 일부 세력들이 이탈해나갔던 듯하다. 문왕 시대에 복속되었던 虞婁靺鞨과 越喜靺鞨이 802년에 다시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朝貢하였던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32)康王 大嵩璘이 일본에 보낸 國書에서 “영토가 처음과 같이 되었다”33)고 언급한 사실도 그간에 일어났던 영토의 상실과 회복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宣王이 즉위한 뒤에는 현재의 興凱湖 북쪽, 遼東지방, 韓半島 서북부 쪽으로 영토를 재차 확장하였다.34)

이에 따라 대외 정복활동이 선왕 시대에 거의 마무리되었고, 5京, 15府, 62州도 이 무렵에 완비되었다. 《新唐書》渤海傳은 일반적으로 張建章의 《渤海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가 발해를 방문한 834년쯤이 기록의 하한이 된다.35)이 때는 大彛震 초기이므로, 대체로 宣王 시대에 완성된 제도를 바탕으로 서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선왕 때에 지방제도가 일시에 완비된 것은 아니었고, 그 골격은 이미 文王 때에 마련되었다. 759년의 玄菟州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高句麗式 地名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에 15부의 하나인 南海府가 777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문왕 후기에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여 府州縣制를 시행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府의 장관을 府尹, 州의 장관을 刺史, 縣의 장관을 縣令이라 하였고, 都督府에 都督, 都護府에 都護를 두었다. 이에 비해서 발해에서는 府의 장관을 都督, 州의 장관을 刺史, 縣의 장관을 縣丞36)이라 하였다. 이렇게 府와 縣의 장관을 都督과 縣丞이라 한 것은 당나라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都督-刺史로 이어지는 계선은 고구려식 지배체제를 바탕으로 한 첫째 단계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발해의 지방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 고구려 전통이 가미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단계에 들어와서는 地方官들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을 것이다.  

《新唐書》渤海傳에는 京·府·州만 기록되어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縣의 명칭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발해의 특산물을 설명한 다음 구절을 보도록 하겠다.

俗所貴者, 曰太白山之菟, 南海之昆布, 柵城之豉, 扶餘之鹿, 鄚頡之豕, 率賓之馬, 顯州之布, 沃州之緜, 龍州之紬, 位城之鐵, 盧城之稻, 湄沱湖之鯽. 果有九都之李, 樂游之梨.(《新唐書》권219, 渤海傳)  

 位城의 鐵과 丸都37)의 오얏이 유명하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遼史》地理志에 보이는 中京의 鐵州 아래에 있는 位城縣, 西京의 桓州 아래에 있는 桓都縣이 분명하다.38)나아가 盧城의 벼와 樂游의 배도 유명하다 하였는데, 《遼史》지리지에는 이들 명칭이 보이지 않지만 이들도 역시 縣 이름으로 생각된다.39)따라서 《新唐書》발해전에 이미 현의 명칭이 나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현의 전체 숫자는 얼마나 되었는가. 일반적으로 100여 개의 縣이 있었다고 하지만,40)이것은 전체 숫자가 아니라 《遼史》地理志 등을 통하여 알려진 숫자에 불과하다. 屬縣의 숫자와 명칭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책에 “故縣 몇 개”로 실려 있는 것들로서, 다음이 이에 해당한다.

   ①中京 소속

盧州(5) : 山陽, 杉盧, 漢陽, 白巖, 霜巖

鐵州(4) : 位城, 河端, 蒼山, 龍珍

湯州(5) : 靈峰, 常豊, 白石, 均谷, 嘉利

榮州 또는 崇州(3) : 崇山, 潙水, 綠城

興州(3) : 盛吉, 蒜山, 鐵山

  ②東京 소속

慶州(6) : 龍原, 永安, 烏山, 壁谷, 熊山, 白楊

鹽州(4) : 海陽, 接海, 格川, 龍河

穆州(4) : 會農, 水岐, 順化, 美縣

賀州(4) : 洪賀, 送誠, 吉里, 石山

  ③南京 소속

沃州(6) : 沃沮, 鷲巖, 龍山, 濱海, 昇平, 靈泉

睛州(5) : 天晴, 神陽, 蓮池, 狼山, 仙巖

椒州(5) : 椒山, 貂嶺, 澌泉, 尖山, 巖淵

  ④西京 소속

神州(3) : 神鹿, 神化, 劍門

桓州(3) : 桓都, 神鄕, 淇水

豊州(4) : 安豊, 渤恪, 隰壤, 硤石

  ⑤定理府 소속41)

定州(5) : 定理, 平邱, 巖城, 慕美, 安夷

潘州 또는 瀋州(9) : 瀋水, 安定, 保山, 能利

  ⑥安遠府 소속

慕州(2) : 慕化, 崇平

 이를 보면 18개 州에 모두 75개 縣이 있었다. 이를 산술적으로 계산한다면 62주에는 대략 258현이 산출된다. 그런데 中京, 東京, 南京, 西京의 4京에는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나머지 주에는 이보다 현이 적었을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발해 전체의 현은 대체로 200-250개의 범위 안에 있었다고 추산할 수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영토에 9都督府, 41州, 100縣을 두었다고 하였으므로,42)이보다 1.5배 내지 2배 정도 더 넓은43)발해 땅에 62州, 200개 이상의 縣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발해보다 훨씬 작은 統一新羅에 9州, 117~120郡, 293~298縣이 설치되었던 사실44)과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발해에서 당나라와 같은 封爵制度가 시행되었으니, 841년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賀守謙은 聞理縣 擬開國男이었고, 이 때에 王弟로 있던 大虔晃은 安豊縣 開國公이었다.45)또 860년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李居正은 均谷枉縣 開國男이었다.46)聞理縣은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安豊縣은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西京 豊州의 首縣이었다. 그리고 均谷枉縣은 中京 湯州 아래의 均谷縣일 것이다. 이밖에 高南申은 開國公, 大昌泰는 開國子, 史都蒙과 王新福은 開國男이었으나, 구체적인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 封爵에는 食邑이 따라붙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實封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여 중앙 귀족·왕족과 지방 州縣과의 실제적인 지배관계를 설정할 수는 없다.

셋째 단계에 와서는 앞 시대에 마련된 府州縣制가 일부 개편되었던 시기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5경, 15부, 62주를 지방제도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모습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宣王 시대까지의 사정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 후에 변동이 없을 리 없다. 선왕 다음으로 즉위한 大彛震 초기에 官制가 개편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47)이 때에 지방제도도 일부 개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당나라의 혼란으로 9세기 중반부터 당나라가 멸망한 해인 907년까지 60년간 발해 사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일부 자료를 통하여 변동이 있었을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遼史》地理志에 의하면 州의 일부를 郡으로도 부르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다음은 그러한 예들이다. 

  盧州. ··· 本渤海杉盧郡.

  鹽州. 本渤海龍河郡.

  穆州. ··· 本渤海會農郡.

  賀州. 本渤海吉理郡.

  豊州. 渤海置盤安郡.

  正州. ··· 渤海置沸流郡.

  雙州. ··· 渤海置安定郡.

  鳳州. 稿離國故地, 渤海之安寧郡境.

이것은 어느 시기엔가 州를 郡으로 개편한 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遼史》를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눈에 뜨인다. 

①唐元和中, 渤海王大仁秀, 南定新羅, 北略諸部, 開置郡邑, 遂定今名.(《遼史》권38)

②天顯元年春正月 ···甲戌, 詔諭渤海郡縣.(윗 책, 권2)

③(蕭)阿古只, ‧‧‧渤海旣平, 改東丹國. 頃之, 已降郡縣復叛, 盜賊蜂起. 阿古只與康黙記討之, 所向披靡.(윗 책, 권73)

④耶律突呂不, ‧‧‧太祖東伐, 大諲譔降而復叛, 攻之, 突呂不先登. 渤海平, 承詔銘太祖功德于永興殿壁. 班師, 已下州郡往往復叛, 突呂不從大元帥攻破之.(윗 책, 권75)

⑤(天顯元年)二月庚寅, 安邊鄚頡南海定理等府及諸道節度刺史來朝, 慰勞遣之.(윗 책, 권2)

宣王 시절에는 5경, 15부, 62주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①에 보이는 郡邑은 막연히 쓰인 용어일 것이다. ②③④에 보이는 郡縣, 州郡도 물론 이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앞에서 제시한 郡 명칭들과 연계시켜 본다면 ①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상의 사료들로 보건대, 비록 전면적이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9세기 중반 이후에 일부의 州를 郡으로 개칭하였던 듯하다. 신라에서는 州郡縣의 3단계 체제를 취하고 있어서 郡은 州 아래의 행정단위에 속하였다. 이에 비해서 당나라에서는 州와 郡이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 초기에 隋나라의 郡을 州로 바꾸어 당나라의 기본 제도가 되었고, 天寶 초기에는 다시 州를 郡으로 바꾼 적도 있다.48)당나라의 경우에 비추어보더라도, 발해에서 어느 한 시기에 州의 명칭을 郡으로 개칭하였을 개연성이 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셋째 단계에서는 府-州郡-縣의 구조를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편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배 체제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⑤에 보이는 바와 같이 道와 節度使도 두었던 것 같다.49)여기에 보이는 節度를 府의 장관인 都督의 별칭으로 본 견해도 있지만,50)그 앞의 道와 연결시켜보면 단순히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당나라에서는 貞觀 원년(627)에 전국에 걸쳐 10道를 두었고, 開元 21년(733)에 15道로 늘렸다.51)당나라에서의 道는 처음에 단순히 감찰 구역을 의미하다가 安史의 난 이후에는 실제적인 행정 구역 명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52)

발해에서 道로 칭해진 예로서 대외교통로인 日本道, 新羅道, 朝貢道, 營州道, 契丹道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대외교통로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지방으로 연결되는 幹線道路 역할도 수행하였다. 발해의 山城과 平地城들이 이 노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고,53)新羅道의 예로 보아서 驛站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다. 사실 高句麗의 南道와 北道도 성과 성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이나 부여와 통하던 대외교통로이자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 역할을 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발해에서 이러한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각 方面을 관장하는 節度使 制度를 운영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54)

그렇다면 이미 그 시원은 대외교통로가 개설된 시기로 잡을 수 있어서, 둘째 단계나 그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셋째 단계에 들어서 지방 세력이 발호하게 되면서 이러한 道制가 적극적으로 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節度使의 명칭이 《遼史》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을 것이다.

참고로 신라에서도 道制가 시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55) 10道 또는 12道와 함께 浿西道와 浿江道 등의 명칭이 보이기 때문이다. 신라에서도 도제가 실시되었다면, 高麗와 같이 구체적인 상급 행정단위로서가 아니라, 교통로와 연계된 감찰 구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당나라나 발해의 道와 성격이 비슷하였을 것이다.

이상으로 3단계에 걸친 지방제도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 좀더 언급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발해가 遼陽을 포함하는 遼東지방과 大同江 이북의 平安道 지방까지 차지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과연 이곳에 어떠한 행정 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는가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요동지방에 安元府(安遠府), 銅州 등과 같은 일부 府, 州, 縣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요동반도와 평안남북도 일대에 발해가 간접 통치하던 高麗侯國 내지 小高句麗國이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56)그러나 여기서 주요하게 인용된 �《新增東國輿地勝覽》은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이고, 《高麗史》地理志의 安北大都護府 沿革도 고려후국과 관련된 사료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이다.

발해 영역이 요동반도까지 미쳤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遼陽에 이르는 요동지방57)과 대동강 이북에 걸친 평안도 지역은 발해 영역에 속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에 비정할 수 있는 마땅한 지명들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곧바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문제점만 지적해 두는 선에서 그치도록 하겠다. 

III. 지방 통치의 실상

 앞에서 지방 통치제도의 변화 과정을 살펴 보았다. 전반적으로 보면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의 지배방식을 계승하였다가, 그 뒤에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전국적으로 一元的인 통치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같은 표면적인 과정만 보면 발해는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과거의 고구려 官吏라든가 각 부락의 首領들을 점차 중앙 세력으로 편입시켜 나아갔을 것이고, 이에 따라 그들의 독립성이 점차 소멸되어 갔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다른 문헌 사료나 고고학 자료에는 반드시 그러하였다고는 볼 수 없는 자료들이 많이 나타난다. 

《新唐書》渤海傳에는 挹婁(虞婁)의 옛 땅에 定理府와 安邊府, 拂涅의 옛 땅에 東平府를 두었고, 鐵利의 옛 땅에 鐵利府, 越喜의 옛 땅에 懷遠府와 安遠府를 둔 것으로 되어 있다. 문맥으로만 따지면 발해가 이들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들이 발해에 편입된 뒤에도 독자적으로 외국에 朝貢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먼저 802년 정월에 虞婁와 越喜 등의 首領들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58)그리고 746년에는 渤海人과 鐵利人들이 모두 1,100여 명이나 일본으로 갔고,59) 779년에도 철리인이 발해 사신 高洋弼을 따라갔다.60)이 때 일본에서 발해인에게뿐만 아니라 철리인에게도 祿을 주었던 것으로 보아서, 철리인들은 발해 사신과 동행하였던 독자적인 사신 일행으로 생각된다. 그러기에 이 해에 鐵利 官人이 渤海 通事였던 高說昌을 능멸하고 윗자리에 앉으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61)이 철리 관인도 철리부에 독자적으로 두었던 관리였을 것이다.

철리인들이 발해인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동행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지방 세력에 대한 발해의 지배력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발해는 각 지역을 정복하면서 그들 세력을 완전히 해체시키지 않은 채 어느 정도는 自治性을 부여하면서 이들을 간접적으로 통제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발해의 지방 행정 구역을 설치할 때에 ‘어느 종족의 땅에 어느 부’ 하는 식으로 각 종족의 거주 지역이 행정 구역 설정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지방세력의 독립성은 발해 중앙 정부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강하였을 것이고, 고구려 지역보다는 말갈 지역에서 더욱 강하였을 것이다. 위에서 든 虞婁, 越喜, 鐵利처럼 대외적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하였던 세력들이 중앙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지역에 있었고, 또한 이들이 모두 靺鞨族이란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말갈 지역에 대한 지배는 首領의 독자적인 지배력을 인정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지방에 마련된 城에 거주하면서 몇 개 단위로 묶어서 주변의 首領들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때로는 지방의 大首領이 중앙의 관직을 띠고 지방의 성을 거점으로 삼아 주변 세력들을 통치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외국에 사신을 보낼 때에도 중앙 정부의 대표자뿐 아니라 지방 세력의 대표자도 동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咸和 11년 渤海 中臺省牒에 보이는 바와 같이 발해 사신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던 65인의 大首領도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62)그리고 792년에 楊吉福이 押靺鞨使의 직책으로 말갈 사신들을 이끌고 당나라에 간 사실이 있고,63)鐵利人들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高洋弼도 철리인들을 押領하는 직책을 띠고 있었다.64)

798년에 당나라에 갔던 茹富仇가 虞侯婁蕃長·都督이었던 사실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65)이것은 여부구가 虞婁部의 蕃將이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에서 임명받은 都督으로서 定理府나 安邊府의 책임자였음을 의미한다. 그가 중앙에서 虞婁部에 파견된 관리인지, 아니면 현지의 虞婁部 大首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발해에서도 가장 동쪽 또는 동북쪽 변경에 위치해 있던 虞婁部가 비록 발해에 편입되어 들어왔지만, 그 대표자가 蕃將과 都督이란 칭호를 지닌 것으로 보아서 이곳이 발해의 영토이면서 한편으로는 발해의 藩國으로도 되는 이중성을 띠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虞婁部의 소재지로는 현재 러시아 沿海州 南部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우루부에 설치되었던 定理府의 소재지66)로 여겨지는 연해주 빠르띠잔스끄 구역의 니꼴라예브까 城 안에서 “左驍衛將軍 聶利計”라 쓰인 魚形 符節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 부절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에는 발해의 중앙 정부가 국경지대의 장군에게 발급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으나,67)발해 10衛에는 左驍衛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唐시기나 五代에 靺鞨 首領이 중국으로부터 받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68)발해 사료를 살펴보면, 大祚榮, 大武藝, 大欽茂, 大嵩璘 등의 발해 왕들이 당나라로부터 左驍衛大將軍으로 책봉되었고, 武王과의 불화로 당나라로부터 망명하였던 大門藝가 左驍衛將軍으로 책봉받은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聶利計는 발해 왕의 동생인 大門藝와 동일한 직급을 받은 것이다. 이로 보아서 그는 발해의 영역 안에 속하면서도 당나라와 독자적으로 교섭하였던 大首領級에 해당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앞에서 다룬 茹富仇와 같은 성격의 인물이었는지 모르겠다.

定理府가 상당한 독립성을 지녔던 사실은 발해가 멸망한 직후에 독자적으로 遼나라에 朝見하였는가 하면, 도리어 반기를 들기도 하였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69)아마 安邊府, 南海府 등과 같이 지방의 각 府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이러한 독립성이 유지되고 있었고,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다룬 바 있지만, 府의 장관을 府尹 대신에 都督이라 하였고, 道의 책임자로서 觀察使 대신에 節度使라 한 것은 지방관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軍政官的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상과 같이 지방 세력들이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 말기에 이르러 寶露國, 達姑가 독립적인 세력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鐵利(鐵勒)의 명칭도 다시 등장하였다.70)그리고 발해가 멸망하고 그 遺民들이 遼東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하기 이전인 928년 정월에 扶餘府 자리에서 이미 女眞族이 등장하였다.71)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말갈 세력들을 제대로 해체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地方勢力의 독자성은 고고학 자료에서도 감지된다. 《新唐書》발해전에 서술된 故地들을 분류하면 크게 고구려 전통을 지닌 지역과 말갈 전통을 지닌 지역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東京, 南京, 西京, 長嶺府가 전자에 속하고, 上京, 中京, 定理府, 安邊府, 率賓府, 東平府, 鐵利府, 懷遠府, 安遠府가 후자에 속한다. 扶餘府와 鄚頡府는 부여 지역에 두었지만, 이곳은 나중에 粟末靺鞨이 차지하였던 곳이므로 후자에 속한다. 따라서 발해 영역을 서북쪽의 吉林, 農安에서 동남쪽의 琿春으로 선을 그어 그 남쪽이 고구려 전통 지역, 그 북쪽이 말갈 전통 지역으로 대략 구분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권은 발해 멸망시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같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古墳 양식이다. 대체로 말갈 지역에서는 長方形 竪穴土壙墓가 만들어졌고, 고구려 지역에서는 石室墓, 石槨墓, 石棺墓와 같은 石墓들이 만들어졌다.

靺鞨人들이 남긴 유적을 중국에서는 同仁文化라고 부르는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靺鞨文化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동인문화의 연대를 5-11세기로 잡고 있고, 러시아에서 말갈문화의 연대를 4-10세기로 잡고 있어서,72)발해 시기에도 이들 문화가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적들에서 확인된 고분들은 거의가 長方形 竪穴土壙墓 양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되는 靺鞨 전통의 토광묘들을 보면 粟末部의 본거지로서 涑州가 설치되었던 吉林과 永吉 일대를 시작으로 하여, 동쪽으로 松花江을 따라 내려가 安居骨部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지적되는 哈爾濱 부근을 지나고, 黑水靺鞨 거주지였던 黑龍江 중류까지 이어진다.73)永吉 楊屯 大海猛 유적은 粟末部가 남긴 유적이고, 哈爾濱 黃家崴子 고분은 安居骨部의 유적이며, 黑龍江 유역에서 발견되는 나이펠드 고분군, 뜨로이쯔꼬예 고분군 등은 黑水部의 유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고분들은 모두가 장방형 수혈토광묘이다.

沿海州 南部에서는 石墓로 된 발해 고분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발해 건국 이전의 靺鞨 古墳들인 竪穴土壙墓들이 근년에 발견되기 시작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발해 시대에 들어서도 靺鞨式의 土壙墓들이 계속 조영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에 咸鏡道와 集安, 東京, 中京 지역과 上京 일대에서 발견되는 발해 시기의 고분들은 거의 모두가 石墓들이다. 和龍 北大 고분군, 安圖 東淸 고분군, 寧安 三靈屯 고분군, 寧安 大朱屯 고분군, 海林 山咀子 고분군, 北靑 坪里 고분군 등은 모두 石室墓나 그보다 규모가 작은 石槨墓, 石棺墓로 되어 있다.

물론 石墓 문화와 土壙墓 문화가 만나는 漸移地帶에서는 두 문화 요소가 혼재되어 나타날 수 있다. 敦化 六頂山 고분군, 寧安 虹鱒魚場 고분군에서 靺鞨的인 요소가 보이고, 토광묘가 중심을 이루는 永吉 楊屯 大海猛 유적이나 楡樹 老河深 유적에 석곽묘나 석관묘가 일부 섞여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크게 보면 발해 영토는 토광묘 분포권과 석묘 분포권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 발해 멸망기까지도 두 가지 계통의 문화가 융합되지 않고 각자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문화적 양분 현상이 지속되었던 사실은 발해 중앙 세력의 지방 세력에 대한 해체력 내지 흡수력이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IV. 맺 음 말

 이상으로 발해 지방 통치제도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검토해보고, 이어서 지방 세력에 대한 통치의 실제 모습을 고찰해보았다.

발해는 처음에 高句麗 統治制度를 계승하였다. 그러다가 8세기 중반에 종전의 통치방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唐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一元的인 地方制度인 府州縣制를 마련하기 시작하였고, 9세기 전반에 전국에 걸쳐 5경, 15부, 62주, 200~250현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일부 제도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으니, 발해 멸망기에 郡이나 道가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四方 5천리에 이르는 全國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이렇게 정연한 통치체제를 마련하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앙의 권력이 지방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하였다. 지방에는 首領이나 土人으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세력이 완전히 불식되지 못하고 끝까지 잔존해 있었으며, 중앙 권력은 그러한 독자적인 세력들 위에 얹혀져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지방 세력들은 때로 唐나라나 日本에 使臣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니, 이 사신들은 독자적으로 파견되었거나, 아니면 발해 사신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이것은 발해 국가 권력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발해 사회는 高句麗系 사람들과 靺鞨系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二元性은 끝내 극복되지 못하고 멸망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멸망 뒤에 곧바로 渤海人과 女眞人으로 분리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발해가 契丹의 공격에 쉽게 무너졌던 것은 그 안에 이러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 시기에 여러 종족들이 융합되어 새로운 민족인 渤海族이 형성되었다는 일부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编辑:李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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