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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的迁都及其背景


宋基豪
2007-04-23 17:41:04 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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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천도와 그 배경

  1. 歷代의 천도 : 머리말에 대신하여

국가의 핵심지를 옮기는 遷都는 국가 重大事인데, 사료에 따라 移都, 徙都 등으로도 나타난다. 새로 수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공력과 시일을 들여야 했고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기에 천도는 논란과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천도가 계획되고 실행되었던 것은 그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도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書經》商書 盤庚篇이다. 반경은 황하의 범람을 피해서 당시 도읍지였던 耿 땅에서 황하 북쪽의 殷 땅으로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수도를 이미 다섯 군데나 옮기면서 지쳐있던 신료와 백성들이 이를 따르려 하지 않자, 그는 벼슬아치와 백성들을 차례로 불러모아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면서 설득과 회유를 한 뒤에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것은 천도 과정에서 봉착하게 되는 난관을 잘 반영하면서, 한편으로 천도는 신료와 백성의 호응을 얻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통치철학을 담고 있어 후대인들이 항상 귀감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부분이다.

중국에서는 상나라가 가장 많이 도읍을 옮겨서 ‘前八, 後五’로 모두 13차례나 된다고 전해진다.1)그리고 주나라 5회를 비롯하여 漢, 魏, 吳, 晉, 隋 등 여러 왕조에서 천도를 실행하였다.2)한국사에서는 비교적 자주 천도한 국가로 고구려와 백제, 발해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는 천도 자체보다는 주로 천도를 둘러싼 논란이 여러 차례 벌어져 천도의 배경과 사유를 되새겨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3)

천도는 天命의 변화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명분론적 해석도 있지만,4)역대의 천도에는 모두 나름대로의 실제적인 사유가 있었다. 조선시대 李恒福의 글에 “옛날의 천도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주나라가 岐山 아래로 옮기고 위나라가 商丘로 옮긴 것은 오랑캐의 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晉나라가 新田으로 옮기고 邢나라가 繹으로 옮긴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고, 盤庚이 殷으로 옮긴 것은 水害 때문이며, 주공이 낙양으로 옮긴 것은 朝聘 때문이었다. 삼대 이래 역대 왕조에서 천도를 하였지만 아무 이유없이 옮긴 사례는 없다”5)고 하였다. 또 송 孝宗 때의 인물인 王質은 “옛날의 천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兵火로 폐허가 되어 옮기거나 이웃의 적이 넘보아서 옮기거나 형세가 절박하여 옮기는 것인데, 지금 北朝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가 해당되지 않는다”6)고 논하였다. 그런가 하면 북위 孝文帝는 오랑캐의 풍속을 漢式으로 一新시키고자 낙양으로 천도하였다.7)이렇게 천도의 사유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상으로 역사에 보이는 천도를 간단히 훑어보았다. 이제 이를 염두에 두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서 발해의 천도를 논해 보겠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몇몇 논문이 발표되었고,8)필자도 이미 다룬 적이 있으므로9)이 글은 기왕의 견해를 더욱 보완하는 형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2. 천도 과정과 성터

 발해는 4회나 천도하여 각각 2회씩 천도한 고구려, 백제보다 빈번하였으니, 비록 상나라나 주나라의 경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이 천도한 왕조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사료는 빈약하기 짝이 없으니, 도읍지와 관련된 사료는 고작 다음에 열거하는 것뿐이다.

 ①-1 : 祚榮遂率其衆, 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舊唐書》199, 渤海靺鞨傳)

①-2 : 率衆保挹婁之東牟山, 地直營州東二千里. ···築城郭以居.(《新唐書》219, 渤海傳)

②-1 : 其後貞元宰相賈耽考方域道里之數最詳, 從邊州入四夷, 通譯于鴻臚者, 莫不畢紀. 其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最要者七. 一曰營州入安東道, 二曰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 ···登州東北海行,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新唐書》)43)

②-2 : 顯州, 渤海國. 按皇華四達記, 唐天寶以前, 渤海國所都. 顯州後爲契丹所倂, 又有集唐二州, 竝撥屬本州. 東至遼州九十里, 又三百九十里至東京, 西至宜州百二十里, 南至乾州七里, 北至醫巫閭山.(《武經總要)前集 16)

③天寶末, 欽茂徙上京, 直舊國三百里, 忽汗河之東.(《新唐書》219)

④貞元時, 東南徙東京. ‧‧‧復還上京.(위와 같음)

ⓛ의 사료는 대조영이 건국한 장소를 설명한다. 대조영이 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는 東牟山이 읍루(계루)의 옛 땅에 있다는 사실과 당나라 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동모산은 山東 蓬萊와 遼寧 瀋陽에도 있었지만 그 위치와 거리로 보아 이들은 대조영의 건국지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건국 지역이 고구려 桂婁部의 故地인지 아니면 挹婁族의 故地인지도 기록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리하여 건국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한 적이 있었으나, 1949년에 길림성 敦化 六頂山古墳群에서 貞惠公主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논의에 거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80년대에 劉忠義가 城山子山城이 동모산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고,10)지금은 이 견해를 통설로 삼고 있으며 아직까지 이견이 별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11)

그런데 천도를 단행하기 전까지 이 산성을 계속 근거지로 삼았느냐 하는 의문은 남아 있다. 당나라 군대에 쫓겨 이곳으로 피신해 왔던 만큼 처음에는 산성에 거주하였겠으나, 일단 한숨을 돌린 뒤에는 좀 더 생활이 용이한 평지로 내려왔을 것은 쉽게 상상이 간다. 그러한 평지성의 후보지로서 敖東城과 永勝유적 가운데 하나가 유력시되어왔고, 특히 근년에는 영승유적 쪽에 더 무게를 두어왔다.12)그러나 2002년과 2003년의 발굴 결과 오동성 성벽은 金代에 축조되었고, 그 안에서 발견된 집자리도 金代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영승 유적도 같은 시대의 절터로 파악되었다.13)이 발굴은 전면적인 것이 아니어서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발해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지 않은 점은 이들이 지금까지의 추정과는 달리 발해 초기 도성지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그렇다면 발해는 시종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았다가 곧바로 현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아니면 성산자산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동모산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앞으로 진행될 고고 조사만이 밝힐 수 있는 사안이다.

아무튼 첫 도읍지에서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이와 관련된 것이 ②의 사료이다. 두 기록 모두 顯州가 발해의 도읍지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후자의 顯州는 지리 위치로 보아서 발해 멸망 후에 강제 이주된 현재의 요령성 北鎭 남서쪽에 해당되지만,14)도읍지와 관련된 부분은 발해 당시의 현주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잠시 ③의 사료에 눈을 돌리면, 마치 舊國에서 上京으로 천도한 것처럼 되어 있어서 이 구국과 ②의 顯州를 동일한 곳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②-1의 600리와 ③의 300리가 너무 차이가 나서 이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舊國이란 단순히 상경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준점에 불과할 뿐이고, 상경 천도 이전의 도읍지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따라 구국은 대조영의 도읍지인 현재의 돈화 일대로 비정되고, 현주는 和龍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구국에서 현주로, 다시 현주에서 상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구국에서 현주로 언제 천도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 ②의 두 사료에서는 서로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②-1에서는 賈耽의 道里記를 인용하면서 顯州가 천보 연간(742-756)에 발해 왕이 도읍했던 곳이라고 한 반면에, ②-2에서는 《皇華四達記》란 책을 인용하여 천보 이전에 발해가 도읍했던 곳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반된 ‘천보 연간’과 ‘천보 이전’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를 따지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新唐書》와 《武經總要》가운데 어느 쪽이 더 원전에 가까운가 하는 점이다. 둘 다 송나라 때에 편찬된 것으로서 《무경총요》는 1044년, 《신당서》는 1060년에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주로 인용되는 《신당서》를 《무경총요》가 재인용하였을 가능성은 사라진다.

다음으로, 《新唐書》와 《武經總要》의 출전에 관한 문제이다. 賈耽의 道里記와 《皇華四達記》는 모두 당나라 賈耽(730-805)이 저술하였다. 《新唐書》藝文志에는 그의 저술로서 地圖�10권, 《皇華四達記》10권, 《古今郡國縣道四夷述》40권, 《關中隴右山南九州別錄》6권, 《貞元十道錄》4권, 《吐蕃黃河錄》4권이 열거되어 있다.15)그는 평생 地理에 큰 관심을 가지고 사방의 사절들에게 직접 탐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한다.16)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저술들은 失傳되어 단편적으로 다른 책들에 인용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武經總要》에 6회 인용되어 있는 《皇華四達記》는 가탐의 도리기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7)이를 받아들인다면 《신당서》와 《무경총요》 모두 가탐의 도리기를 원전으로 삼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도리기를 인용한

《신당서》지리지(⑤-3, ⑥-3)와 《황화사달기》인용문 네 곳(⑤-1,2 및 ⑥-1,2)을 서로 비교해보면 밑줄을 그은 것처럼 문장의 出入이 드러난다.

⑤-1 : 按皇華四達記, 北渡海至馬石山五百里, 舊女眞國, 今契丹界. ···一路往三韓, 海行東北, 歷大謝鼉歌烏湖等島約三百里, 又傍海岸, 歷靑泥鋪桃花鋪杏花鋪駱駝灣約八百里, 自其[貝]江口卽新羅界.(《武經總要》前集 16, 登州)

⑤-2 : 按皇華四達記, 唐天寶以前, 渤海所都.(《武經總要》前集 16, 顯州)

⑤-3 : 登州東北海行, 過大謝島龜歆末島烏湖島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之都里鎭二百里. 傍海壖, 靑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槖駝灣烏骨江八百里. 乃南傍海壖, 過烏牧島貝江口椒島, 得新羅西北至長口鎭.··· 又陸行四百里至顯州, 天寶中王所都.(《新唐書》)43)

⑥-1 : 按皇華四達記, 營州東百八十里, 凡九遞至燕郡城. 自燕郡東經波羅寺抵, 渡遼州七十里驛至安東都護府五百里.(武經總要前集 16, 宜州)

⑥-2 : 皇華四達記曰, 自安東府, 東南至平壤城八百里,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西北至建安城約五百里, 正南微東, 至鴨綠江北泊七百里.(《武經總要》前集 16, 東京)

⑥-3 : 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又經汝羅守捉, 渡遼至安東都護府五百里. 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西至建安城三百里, 故中郭縣也, 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 故安平縣也.(《新唐書》)43)

 ‘汝羅守捉’을 ‘波羅寺抵’라고 하는 등 전반적으로 《무경총요》쪽에 부정확한 글자가 많이 보이지만, ‘馬石山五百里’나 ‘遼州七十里驛’등 신당서��에서는 인용되지 않은 문구도 나타난다. 따라서 두 책은 서로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동일한 출전을 독자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약간의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두 가지 검토를 통해서도 어느 쪽이 가탐의 원문에 충실한지 따지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은 다른 방증 자료가 등장하지 않는 한 ‘천보 연간’인지 ‘천보 이전’인지 단정할 길이 없다. 《무경총요》가 오자가 많은 점에서 《신당서》에 더 비중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천보 연간’이 옳다고 한다면 문왕 때에 세 번이나 천도한 것이 되어 너무 빈번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단순한 추측이지만 ‘천보 이전’, 더 나아가 무왕 때에 천도한 것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이럴 경우에 《武經總要》처럼 ‘천보 이전’에 도읍하였고, 《新唐書》의 기록은 앞서 천도하였는데 ‘천보 연간까지도’ 도읍지로 삼고 있었다고 재해석할 수 있다. 천보 말년에 상경성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천보 연간에 도읍지로 삼고 있었던 顯州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로 넘어가겠다. 다음 기록에 따르면 현주는 中京顯德府에 속하였다.

⑦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以肅愼故地爲上京, 曰龍泉府, 領龍湖渤三州. 其南爲中京, 曰顯德府, 領盧顯鐵湯榮興六州. 𧴖貊故地爲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爲南京, 曰南海府, 領沃睛椒三州. 高麗故地爲西京, 曰鴨淥府, 領神桓豊正四州.(《新唐書》219, 渤海傳)

 현주의 소재지를 따지기 전에 현주가 과연 中京顯德府의 首州인가를 먼저 짚어보아야 한다. 상기 자료를 보면 龍泉府는 龍州, 沃沮故地에 둔 남경은 沃州가 수주로 되어 있으므로, 명칭의 유사성으로 보아서 顯德府의 수주는 盧州가 아니라 顯州가 되어야 할 듯한데, 제일 앞에 오히려 노주가 나타나 있다. 이에 따라 원래는 현주가 首州였다가 나중에 노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18)그런가 하면 秋山進午는 도읍 시절의 顯州는 河南屯古城에 있다가 상경으로 천도한 뒤에는 蠶頭城으로 옮겨서 제2의 현주로 삼았으며, 西古城은 盧州였다고 주장한다.19)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으니 이는 《遼史》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⑧顯州 ··· 本渤海顯德府地

  盧州 ‧‧‧ 在京東一百三十里

  鐵州 ‧‧‧ 在京西南六十里

  興州 ‧‧‧ 在京西南三百里

  湯州 ‧‧‧ 在京西北一百里

  崇州 ‧‧‧在京東北一百五十里(이상 《遼史》권38)

⑧의 6개 州는 모두 중경현덕부 소속이다. 다만 이곳의 崇州는 사료⑦에서 榮州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글자 형태의 유사성으로 빚어진 잘못으로서 실제로는 동일하다. 이처럼 《요사》에는 顯州를 제외한 5개 주가 京으로부터 얼마의 거리에 있는가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기준이 되는 京이 어디냐 하는 점이 의문이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이들이 요동으로 옮겨져 遼 東京遼陽府에 소속되었으므로 이 동경요양부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그러나 이를 기준으로 하게 되면 각 州의 방위와 거리가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발해 당시에 中京顯德府를 기준점으로 잡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顯州의 경우에 방위와 거리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방위와 거리의 기준이 되는 京이 바로 顯州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발해 후반기까지 중경현덕부의 수주는 현주였던 셈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에 《新唐書》발해전 기록이 잘못 되어 노주와 현주 서술 순서가 바뀐 것뿐이지, 首州가 현주에서 노주로 변경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노주는 현주의 동쪽 130리 즉 대략 65km쯤 떨어져 있었으므로 西古城에 현주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지금의 延吉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만 顯州가 처음부터 西古城에 있었는지는 한 번 검토해보아야 한다. 田村晃一은 瓦當 文樣을 편년하여 와당의 시대적 변천을 살펴보고자 하였다.20)자신의 편년관에 따르면, 西古城과 八連城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蓮花文 瓦當은 上京城 창건시에 만들어진 것보다 1형식 내지 2형식이 늦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고성은 상경성 창건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에 따라 서고성에서 직선거리로 남쪽 약 2.5km 떨어진 海蘭河 河邊의 河南屯古城에 주목하였다. 마침 이곳에서는 고구려적인 문양으로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變形忍冬文 와당이 출토된 적이 있다. 또한 고성 안에서 발해시대의 무덤이 출토되어 이 성이 일찍 폐기된 현상도 그 근거로 들었다. 이런 사실들을 토대로 그는 상경 천도 이전의 顯州는 하남둔고성, 상경 천도 이후 5경제가 실시되면서 설치된 中京顯德府는 서고성에 소재하였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였다.21)

일제시대 이후 하남둔고성은 발굴된 적이 없고, 서고성은 2000-2년에 걸쳐 3년간 발굴되었으나22)아직 정식 보고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상경성에 비해서 관련 자료가 훨씬 빈약하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남둔고성에서 출토된다는 忍冬文 와당과 비슷한 유형은 서고성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므로,23)서고성이 나중에 축조되었다고 파악할 수는 없다. 아울러 하남둔고성 안에서 발견된 고분이 발해시대에 속하는지 아니면 그 이후에 해당하는지도 아직은 의견이 엇갈려서,24)하남둔고성의 폐기 연대도 불확실한 실정이다. 따라서 현주가 처음부터 서고성에 있었는지, 아니면 하남둔고성에 있다가 옮겼는지 현재의 자료만 가지고는 확인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顯州 천도의 문제를 상당히 길게 논의하였으니, 이제 上京 천도로 옮겨보겠다. 上京이 지금의 흑룡강성 寧安에 있는 上京城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천보 말년’이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하는 점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천보 말년에 일어난 安祿山의 난이다. 그는 755년 11월에 范陽(현 北京)에서 난을 일으켜 12월에 남쪽의 東京(현 洛陽)을 함락하고 서쪽으로 長安(현 西安)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6월에 玄宗이 蜀 지방으로 피신하였고, 7월에는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아 至德 元載로 연호를 바꾸었다. 후술하다시피 이 난은 발해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이에 따라 일찍이 경략해두었던 상경성으로 급히 옮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755년 11월 9일에 난이 일어나자마자 천도하였기보다는 난의 추세를 보면서 이듬해 전반기에 실행에 옮겼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따라서 상경성 천도 시기는 756년 전반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이제 貞元 연간(785-805)의 東京 천도로 넘어가겠다. 정원 연간이라고 하였지만 문왕이 793년에 사망하고 그 후에 上京으로 재천도하였던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 시기는 780년대 후반이 유력하다. 그러나 연도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 때의 천도 장소로는 琿春 八連城으로 보는 데에 별 이견이 없다.25)

그렇지만 이곳에서 남쪽으로 7.5km 떨어진 두만강변의 溫特赫部城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발해에서 요·금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고구려 성터를 이어받아 발해시대에도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26)이렇게 溫特赫部城이 고구려에서 발해까지 사용된 데에 비해서 八連城은 발해 때에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발해가 고구려 고성을 활용하다가 곧이어 팔련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겠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자료는 없으므로 앞으로 발굴이 되어야 이 의문이 풀릴 것이다.

三上次男이 고구려 양식을 지닌 八連城 출토의 二佛竝坐像이 원래는 北高力城子(裴優城)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는데,27)이 성은 요․금 시대에 속하므로 오히려 南高力城子(溫特赫部城), 또는 두 성을 아우르는 高句麗古城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팔련성이 완성된 뒤에 온특혁부성과 같은 고구려 성 안에 안치되었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경으로의 還都 문제이다. 《新唐書》 기록으로 보아서 문왕이 사망하고 大元義를 거쳐 成王 大華璵가 즉위한 직후에 상경으로 재천도하였다. 그리고 “(國人)推宏臨子華璵爲王, 復還上京, 改年中興.”이라 한 문장으로 보아서는 왕이 되자마자 改元도 하기 전에 상경으로 옮긴 느낌이 든다. 다른 왕들의 경우에 즉위 사실에 이어서 곧바로 改元을 밝히고 있는 것과 대비가 된다. 문왕이 793년 3월 4일 사망한 뒤에 왕권을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원의가 ‘一歲’동안 재위하였다가 성왕에게로 계승되어 794년에 사망한 점을 고려한다면, 성왕의 즉위는 793년 말이나 794년 초가 될 것이고 상경 재천도는 그가 즉위하자마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改元 이전에 실행된 것이라면 793년 말일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아마도 성왕은 대원의가 왕권을 찬탈하였다가 피살된 도성을 빨리 떠나고 싶었을 것이고, 그런 까닭에 엄동설한의 한겨울에 수도를 상경으로 다시 옮기게 되었을 것이다. 

3. 천도 배경

 중국 역사에 보이는 천도 사유는 앞서 간단히 열거해보았다. 오랑캐의 난을 피하기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水害를 피해서, 朝聘을 위해서, 兵火로 폐허가 되어서, 이웃의 적이 넘보아서, 형세가 절박해서, 오랑캐 풍속을 바꾸기 위해서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크게 보면 내부적인 요인 또는 외부적인 요인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내부적인 이유에서이고, 백제가 위례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외침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때때로 두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발해는 여러 차례 천도를 하였으나 그 이유가 드러나 있지 않다. 단지 현주에서 상경으로 천도한 경우에만 그 원인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전해질 뿐이다. 따라서 이 자료부터 검토하겠다.

⑨太宗卽位, 上表曰, 我大聖天皇始有東土, 擇賢輔以撫斯民, 不以臣愚而任之, 國家利害, 敢不以聞. 渤海昔畏南朝, 阻險自衛, 居忽汗城. 今去上京遼邈, 旣不爲用, 又不能戍, 果何爲哉.(《遼史》75)

이것은 東丹國의 재상이었던 耶律羽之가 遼 太宗에게 上表한 내용 일부이다.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 상서는 929년에 작성된 것이니,28)상경 천도로부터 무려 173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그럼에도 상경 천도 원인을 언급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이 문장에 따르면 발해는 南朝를 두려워 하여 방어하기에 편리한 忽汗城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남조는 북쪽의 요나라와 대비시킨 남쪽의 중원 왕조로서 직접적으로는 당나라를 의미한다.29)따라서 당나라를 두려워하여 상경에 도읍을 정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의 해석에 이견이 있으므로 이를 더 검토해보겠다. “渤海昔畏南朝, 阻險自衛, 居忽汗城.”의 구절이 발해 건국 과정을 설명하는 《舊唐書》나 《新唐書》의 기록과 유사하므로 건국시의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것이다.30)그러나 이 上表文은 929년에 작성되었고, 이보다 늦게 《구당서》는 945년, 《신당서》는 1060년에 완성되었으므로 耶律羽之가 이들을 참고할 수는 없다. 또한 《구당서》는 五代 後晋에서 편찬되었고, 야율우지 상표문은 요나라 초창기에 작성되었으므로, 《구당서》가 야율우지의 상표문을 참고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두 자료는 서로 별개의 것이므로 문구의 유사성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이를 인정한다 해도 야율우지의 의도가 발해 건국 과정을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忽汗城은 《遼史》의 다른 기록들에서 발해 수도를 지칭하고 있고, 상표문에서 발해 땅은 東土로 표현되어 있다. 또 上京에서 멀다는 것도 발해 수도를 중심으로 한 핵심부를 가리킨다 할 수 있다. 비록 야율우지가 발해 건국 사정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문장 흐름으로 보아서는 일단 홀한성에 거주하게 된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발해는 평시에도 당나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武王과 다투었던 大門藝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⑩-1 : 至是(大門藝)謂武藝曰, 黑水請唐家官吏, 卽欲擊之, 是背唐也. 唐國人衆兵强, 萬倍於我, 一朝結怨, 但自取滅亡. 昔高麗全盛之時, 强兵三十餘萬, 抗敵唐家, 不事賓伏, 唐兵一臨, 掃地俱盡. 今日渤海之衆, 數倍少於高麗, 乃欲違背唐家, 事必不可.(《舊唐書》199)

⑪-2 : (大)門藝嘗質京師, 知利害, 謂武藝曰, 黑水請吏而我擊之, 是背唐也. 唐大國, 兵萬倍我, 與之産怨, 我且亡. 昔高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可謂雄彊, 唐兵一臨, 掃地盡矣. 今我衆比高麗三之一, 王將違之, 不可.(《新唐書》219)

상기 두 사료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만, 조금씩 내용이 달라서 함께 인용하였다. 과거 고구려 전성기에 强兵이 30여만 명이나 되어 당나라에 대적하였으나 당나라 군대가 한 번 출동하매 고구려 영토가 완전히 씻겨버릴 정도였으니, 고구려의 1/3 정도 군사력만 가지고 있는 발해로서는 당나라에 절대로 반기를 들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이로 보면 고구려 유민으로 이루어진 발해 위정자들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으로 당나라는 공포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여기에 발해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당나라 군대에 쫓겼던 회상도 겹쳐졌을 것이다. 당나라 군대와 천문령에서 전투를 벌였고 급기야는 연고권도 없는 먼 동쪽의 말갈 땅에 피신해 건국하였다. 이 때 다시 추격해올지 모르는 당나라 군대에 대비하여 방어에 편리한 동모산에 성을 쌓고 그곳에 거주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역사적 기억을 지니고 있었던 발해 상층부에게 安祿山의 난 발발은 또 하나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발해에서 들은 사실을 일본 조정에 전한 小野田守의 758년 12월의 보고에도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31)이에 따르면 755년 11월 9일에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12월에 洛陽으로 입성하였고, 이듬해 6월 6일에 천자가 劒南으로 피신하고 7월에 황태자가 황제에 즉위하여 至德으로 개원하였다. 그 후 平盧留後事 徐歸道가 張元澗을 보내 10월에 안녹산을 친다는 명분으로 발해 兵馬를 징발하려 하다가 발해의 의심을 받았고, 758년 4월에는 安東都護 王玄志가 다시 사람을 보내 평정의 결과를 알렸으나 이것도 의심하여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탐문하도록 하였다. 일본 천황은 이런 소식을 전해듣고서, 안녹산32)은 미친 오랑캐로서 서쪽을 도모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동쪽을 칠 것이니 미리 대비를 철저히 하라고 太宰府에 지시하였다.

이처럼 안녹산의 난은 당나라에 혼란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발해와 일본에게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비록 이것이 상경 천도 뒤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지만, 반란군이 혹시나 동쪽으로 몰려올까 두려워 한 일본측의 생각은 그대로 발해측 공포심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에 청나라가 붕괴되면 만주족이 다시 동쪽으로 몰려와 조선이 혼란스러워질까봐 항상 노심초사했던 상황과도 통한다. 반면에 당나라와 긴밀했던 신라는 몽진했던 촉 지방에까지 사신을 파견하여 당 현종이 칭찬하는 시를 내리기도 하여 대조를 이룬다.

아무튼 이 난은 발해가 상경으로 천도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당나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북쪽 방면에 도읍지를 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가운데에 수도를 두면서 東部를 上部라 하고, 당나라가 中京을 上都라 한 것과 달리 발해가 上京을 북쪽에 둔 것은 이 때문이었다.33)이리하여 수도를 국토의 중앙에 배치하는 상례와 어긋나는 배치 형태가 되었다. 신라가 통일을 한 뒤에 수도를 중앙부로 옮기지 않고 경주 모퉁이에 안주함으로써 결국 고구려·부여 등의 땅을 확보하지 못하고 국내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고 한 韓百謙의 지적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34)

비록 당시는 지구의 온난기에 해당하여 북방에서의 생활도 가능한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남방에 비해서 여건이 열악하였을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만주지방에서 역사상 金 上京(白城) 다음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하였고, 더구나 금 상경은 그들의 발상지로서 건국 초기에 38년간만 수도였던 반면에 발해 상경은 거의 전기간에 해당하는 160여년간 수도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발해 상경으로의 천도는 그만큼 절박하였음을 의미하며 당나라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난이 일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사이에 갑작스럽게 준비도 없이 상경으로 천도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상경 지역은 이미 武王시대에 복속되었을 것이니 “동북쪽의 오랑캐가 신하가 되었다”고 하였고, 726년에 黑水靺鞨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이 때를 전후한 시기에 현지의 토착 말갈세력이 남긴 고분군이 虹鱒魚場 고분군으로 추정된다.35)이 고분군은 비교적 早期의 것으로 말갈적 요소를 다분히 띠고 있고 상경성에서 직선거리로 5km 이상 떨어져 있어, 상경성이 축조되기 전에는 이 일대가 세력의 근거지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발해는 이곳에 관리를 파견하여 감독하였으니, 고분 가운데에는 이들의 무덤도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다가 천도를 하고 상경성을 축조하면서 중심지를 현재의 渤海鎭으로 옮겼을 것이다.

이상으로 상경 천도의 정황을 짚어보았다. 그러나 나머지 천도는 정황에 의존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다. 먼저, 동모산에 건국하였던 것은 이미 지적하였듯이 당나라 군대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대조영은 원래 高麗故地였던 요동에 안착하려 하였으나, 당나라 추격군 때문에 아무 연고가 없던 지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顯州로의 천도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遼나라의 5경 기록에 비추어 발해 5경의 위상을 유추할 필요가 있다. 요나라의 경우 西京에는 邊防官이 많았고 南京과 中京에는 財賦官이 많았다. 이처럼 발해 5경 사이에도 역할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서 평야가 널리 펼쳐져 있는 中京과 東京에는 財賦官이, 山地가 많은 西京이나 新羅에 가까운 南京에는 邊防官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36)그렇다면 현주(중경)는 경제적 이득이 높은 곳으로 이를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모산 일대에서 한숨을 돌린 뒤에는 평야가 너르고 기름진 현주 지역으로 천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고구려 故地로의 복귀란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당초에 고구려 고지에 건국하려 하였으나 좌절되었던 꿈을 또 다른 고구려 고지에서 이루었던 것이다. 이곳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들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교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732-3년 사이에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 뒤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천도를 하였으므로 아직은 친선관계를 염두에 둔 조처를 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상경에서 동경으로의 천도는 조금 자세히 고려해볼 것이 있다. 문왕의 통치시기는 현주시대, 상경시대, 동경시대로 3분할 수 있다. 그런데 상경시대가 국력 신장과 왕권 강화의 시기였다고 한다면, 동경시대는 그의 말년에 정치적인 모순이 노출되던 시기였다.37)상경시대에 만들어진 貞惠公主 묘지에는 維新을 표방하면서 寶曆이란 연호가 사용되었지만, 동경시대에 만들어진 貞孝公主 묘지에는 유례없이 그 이전의 大興이란 연호로 되돌아가 있다. 이것은 동경으로의 천도가 뭔가 개혁의 쇠퇴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런 퇴조 분위기 속에서 동경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기왕에 상경성을 기반으로 한 國人層이나 동경을 기반으로 한 大元義系를 설정하여 천도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시도들38)이 있어 왔지만, 이것은 사료적 해석을 과도하게 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원의를 살해한 國人은 中央 貴族勢力을 汎稱한 것으로서 群臣이나 臣僚와 동일한 개념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康王이 일본에 보낸 國書에 官僚란 용어가 보이는데, 이 역시 전문적인 관료층을 지칭하기보다는 국인과 동일한 의미로서 단순히 臣僚나 臣下를 의미한다.39)따라서 이 사료만 가지고 지역적 기반을 염두에 둔 政派를 설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천도 지역으로 동경을 선택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를 고려해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이곳이 日本道의 시발점인 점에서 일본과의 교류를 의식하였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40)그러나 이것은 일본측 연구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으로 과연 천도까지 하면서 바다 건너 일본과 특별히 깊은 연관을 맺을 이유만 이 시기에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따라서 좀 더 배경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역 기반에 주목했을 수 있다. 이곳은 예맥 고지요 고구려 고지였다. 당나라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한 곳이면서 고구려 지역 가운데 통일전쟁의 피해가 가장 적어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불병좌상에서 보듯이 고구려 불교 신앙이 발해로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불병좌상 광배에 보이는 어깨 정도만 드러난 蓮花化生의 모티프는 고구려 장천 1호분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41)또한 東京의 屬州인 鹽州가 있던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의 馬面은 요·금시대의 雉堞과 다르고 고구려 것에 가깝다고 한다.42)이처럼 동경 일대는 고구려 전통이 강하게 온존해 있던 곳이다. 

 그러나 동경과 함께 중경도 고구려 고지였으므로 왜 굳이 이곳을 선택하였는가 하는 점은 더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동경은 日本道의 시작이면서 新羅道의 시발점이었다. 이런 점에서 동경으로의 천도는 신라와의 교류도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마 일본과의 교류보다는 신라와의 관계가 더 크게 고려되을지도 모르겠다. 신라에서 790년에 一吉湌 伯魚를 발해에 파견한 적이 있는데,43)연대로 보아 東京에 도읍을 정하고 있을 때가 확실하다. 그렇다면 신라와의 밀접한 관련을 맺기 위해 단행된 동경 천도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812년 발해에 파견된 崇正의 級湌 관등(9등)보다 두 단계 높은 점도 이 시기 파견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경으로의 還都 원인이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물려받은 成王으로서는 大元義의 왕권 탈취와 뒤이은 피살로 얼룩진 무대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싶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成王 大華璵는 大宏臨의 아들이었다. 황제로도 지칭하며 발해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던 祖父 文王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는 上京으로의 복귀를 꿈꾸었을 것이며, 이리하여 즉위의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전격적으로 천도가 실행되었던 것이다.

4. 맺음말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자주 수도를 옮겨다녔다. 그러나 도읍지와 천도의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커녕 추측마저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자료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에는 단순한 추정에 불과한 면도 없지 않지만, 역사적 상황과 사료를 바탕으로 가능한 한 무리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이제 앞에서 검토해본 결과물을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발해의 천도는 모두 네 차례 이루어졌다. 건국 초기의 중심지는 길림성 敦化의 성산자산성과 그 부근의 영승유적 일대이다. 당초 자신의 연고지인 요동지방에 웅거하려 하였으나 당나라 군대의 추격으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먼 말갈땅으로 쫓겨와 도읍을 정한 것이다. 그러다가 天寶 이전인 무왕 때에 顯州로 도읍을 정하였다. 이 일대는 지금도 기름진 옥토지대인 점으로 보아 경제적 고려가 중요한 요인이었겠지만, 高句麗 故地로의 복귀란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문왕은 당나라에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756년 초에 평소 경략해두었던 上京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상경성지는 흑룡강성 寧安의 渤海鎭에 소재한다. 이곳은 평야가 너른 곳이기는 하지만 기후면에서 경제 활동이 불편한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안녹산의 난 파장이 발해에까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먼 곳으로 피신한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문왕은 이곳에서 국가의 기틀을 완성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는 장기간의 통치로 말년에 한계에 부닥치자 780년대 후반에 東京으로 또 천도하였다. 이 때의 도읍지는 이전에 고구려 때의 성을 물려받아 사용하다가 부근에 새롭게 조성한 八連城이었다.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예맥의 고지요 고구려 고지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新羅道의 출발점이며 통일신라계 와당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서 新羅와의 교류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어난 내분과 왕의 피살은 도읍지로서의 매력을 상실하게 하였고, 급기야 成王이 즉위하자마다 793년 말쯤에 상경성으로 되돌아가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리하여 상경성은 만주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북쪽에 있었던 도읍지로 남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발해의 천도는 230년 가까운 세월 가운데 8세기에만 집중되었다. 그런 점에서 건국 이후 내부의 안정화 과정과 천도가 연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9세기에는 상경성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또 천도가 잦았던 것은 다른 국가에 비해서 도읍지에 축적된 전통 기반 세력이 그다지 강고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문화적 축적이 별로 없던 곳에서 발해가 건국되어 토착세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던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각 지역에 기초를 둔 政派 세력을 설정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리고 건국지의 선정과 상경 천도는 외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고, 顯州 및 上京 還都는 내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던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동경 천도는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이 맞물려 일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다른 역사에서 보듯이 내부의 지배세력 변화와 연계해서 설명할 만한 자료가 발해에는 전혀 없으므로, 더 구체적인 해명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编辑:李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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